나무아미타불

[스크랩]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데 여전히 회향이 필요한가?

혜월(慧月) 2018. 6. 5. 11:00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데 여전히 회향이 필요한가?

 

질문: ‘나무아미타불나무두 글자에는 귀명·회향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일생동안 이 육자명호를 칭념한다면 여전히 회향문 원이차공덕, 평등시일체, 동발보리심, 왕생안락국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까?

 

답변: ‘나무이 두 글자를 선도대사님은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

 

  ‘나무란 말은 곧 귀명이다. 또한 회향발원의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 염불을 하면서도 나무라는 이 두 글자에 대해 일반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부 아미타불네 글자를 부르는 사람들은 더욱 그 의미를 음미하지 않을 겁니다.

 

  실은 육자명호에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도대체 여섯 자를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네 글자를 불러야 할까요?

 

관경하품하생에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

  南無阿彌陀佛

 


  옛날에 어떤 사람들은 관경하품하생에서 오역과 십악의 죄를 지은 사람은 금생에 왕생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 왕생할 수 없냐면 단지 발원만 있고 행이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관경에서 말하는 오역과 십악의 죄를 지은 사람이 비록 왕생을 하고 싶지만 수행이 없고 공덕이 없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도 이 사람은 금생에 왕생할 수 없고 반드시 다음 생에도 수행을 해서 원행願行이 구족되어야만 왕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선도대사님은 이런 주장을 겨냥해서 염불하는 사람은 원행이 구족되었다고 특별히 설명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구족했을까요? 선도대사님은 이 여섯 글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셨지요.


나무란 말은 곧 귀명이요, 또한 회향발원의 뜻이기도 하다.

아미타불이란 말은 곧 그 행이다.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한다.

南無即是歸命

亦是發願回向之義

阿彌陀佛即是其行

以斯義故必得往生

 

  우리가 부르는 나무아미타불이 여섯 글자에는 매우 깊은 함의가 들어있습니다. ‘나무는 귀명을 나타냅니다. ‘나무는 내가 부처님께서 귀명한다, 나는 부처님의 의지한다는 것으로, 귀명은 곧 의지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귀의(귀의불)를 말하는데 귀명은 귀의보다 의미가 좀 더 깊습니다. 귀의는 삼보에 귀의할 수 있고 어떤 부처님께 귀의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귀명은 완전히 귀순하고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부처님 이 한분에게 완전히 귀명하고 아미타부처님 이 한분을 완전히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무에는 또 발원과 회향의 뜻이 있어 우리가 아미타부처님께 귀명하는 자체가 바로 발원과 회향입니다.

 

  무엇을 발원회향이라 부를까요?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내가 서방정토에 왕생하려 하고 내가 나의 공덕을 회향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토법문의 이 발원회향은 어디에 있을까요? ‘귀명속에 있고 나무라는 이 두 글자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염불하며 아미타부처님께 귀명을 하는 동시에 우리의 마음은 서방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것이기에 이것을 발원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이 발원은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까요? 바로 나무에서입니다. 내가 아미타부처님께 귀명을 하는데 귀명을 하는 목적이 바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원력도 그 속에 있고 회향 역시 그 속에 있습니다.

 

  범부의 마음은 모두 사바세계에 미련을 갖고 있고 세속의 모든 것에 미련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마음을 돌이켜서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을 발원회향이라 부르는데, 발원회향나무하는 가운데 완성되었습니다.

 

  “‘아미타불이란 말이 곧 그 행이다”, 우리가 회향발원을 하며 아미타부처님께 귀명을 한 뒤에 아미타부처님은 우리의 수행이 되고 우리의 의지처가 됩니다. 따라서 정토법문에서 왜 왕생은 불력에 의지하는 것인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께 귀명을 할 때, 부처님의 공덕은 바로 작용을 일으켜서 부처님의 광명으로 우리를 섭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요즘은 교통수단이 매우 발달되어 집을 나서면 비행기를 타거나 배 또는 기차를 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행기에 올랐을 때 이 비행기가 우리를 목적지까지 태워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고 완전히 비행기의 힘에 의지하는 것을 귀명이라 부르는데, 비행기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곧 나무를 뜻합니다. 비행기에 오른 뒤에 비행기가 날기 시작하면 우리가 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얌전히 앉아서 비행기가 착륙하기만 기다리면 됩니다.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염불은 우리가 할 일이고 왕생은 부처님께서 하실 일이므로 왕생에 대해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배에 오른 뒤에는 이 배가 침몰할지 안 할지, 혹은 이 배가 목적지까지 갈지 안 갈지를 걱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배에 오른 뒤에 다른 일들은 전부 선장에게 맡기는 겁니다.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은 왕생을 누구에게 맡길까요?

 

  아미타부처님께 맡기고 우리는 일심으로 염불만 하면 됩니다. 이것을 귀명이라 부릅니다. 발원회향도 그 속에 있고, 나아가 왕생에 필요한 공덕과 수행도 전부 그 속에 있으므로 이것이 바로 원행이 구족한 것願行具足입니다.

 

  선도대사님의 육자석六字釋에서는 정토법문의 신원행을 모조리 그 속에 포함시켰습니다. 귀명은 곧 신앙입니다. 완전한 귀명은 완전한 신앙을 뜻하고, 완전한 신앙은 자연히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할 것이며, 아미타부처님은 곧 우리의 수행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원행이 다 있기 때문에 삼자량은 육자명호 속에 원만히 구족되었습니다.

 

  우리 염불인들은 마지막에 회향을 해야 할까요?

 

  만일 조석으로 정해진 기도에서 일종의 의궤로 삼는다면 그건 괜찮습니다. 다들 염불을 마친 후에 하는 회향게 하나가 있습니다.


원이차공덕, 평등시일체,

동발보리심, 왕생안락국.

     願以此功德平等施一切

     同發菩提心往生安樂國

  

  이 게송은 선도대사께서 쓰신 것입니다. 이 회향은 왕생을 위한 게 아니라 이 공덕을 시방중생에게 회향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 자신이 염불왕생을 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부처님의 공덕을 받아들이고 염불왕생하기를 바랍니다. 이는 자리이타를 위한 것이므로 이것은 회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의 회향은 이러한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수행공덕을 회향하여 정토왕생을 구하고 있습니다. “원이차공덕, 장엄불국토, 상보사중은, 하제삼도고(願以此功德莊嚴佛淨土上報四重恩下濟三途苦)……이는 자신의 수행공덕을 회향하여 서방정토왕생을 구하는 것으로, 왕생은 자신의 자력에 의지한다는 생각입니다.

 

  선도대사님의 해석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무란 말은 곧 귀명이요, 또한 발원회향의 뜻이기도 하다”, 우리의 마음이 아미타부처님께 귀명할 때 아미타부처님은 우리의 공덕이 되고, 왕생에 필요한 공덕도 이미 구족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이 돌아오면 기타 회향이 필요 없습니다.

 

  왕생은 우리의 공덕에 의지하여 회향왕생하는 게 아니라 불력의 접인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귀명을 하는 동시에 불력은 작용을 일으킵니다. 마치 우리가 배위에 오를 때 배의 힘이 곧 우리의 힘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익대사님의 미타요해에 이런 법어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원으로써 중생들의 많은 선근의 인이 되어주시고,

대행으로써 중생들의 많은 복덕의 연이 되어주셨다.

佛以大願作衆生多善根之因

以大行作衆生多福德之緣

 

 

  부처님의 대원대행은 모두 우리 중생들의 선근과 복덕의 인연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부처님을 의지할 때 부처님의 대원대행은 우리의 선근과 복덕이 되고 부처님의 수행은 우리의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토법문은 불력에 의지하는 법문입니다. 진정한 회향은 아미타부처님께서 당신의 공덕을 우리 중생에게 회향해주시는 것입니다.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시길, “중생들에게 진실한 이익을 베풀어주신다惠以衆生真實之利고 하셨는데, ‘란 곧 부처님의 공덕을 중생에게 혜사惠賜(은혜를 베풀어 남에게 주다)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토법문은 부처님의 공덕을 받아들이는 법문입니다. 중생이 부처님께 귀명하면 부처님은 당신의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해주시는데, 이것이 진실한 회향입니다.

출처 : 순정시대 純淨時代
글쓴이 : 淨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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