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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가 있어야 의미가 있지 않은가에 대한 .....

혜월(慧月) 2020. 2. 15. 09:54

윤회를 하며 기쁨과 슬픔이 있어야 의미가 있지 육도를 벗어나 슬픔도 기쁨도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정토염불 법문

慧蓮 | 조회 34 |추천 0 |2020.02.15. 01:14 http://cafe.daum.net/amtb/4BkF/1751 

윤회를 하며 기쁨과 슬픔이 있어야 의미가 있지 육도를 벗어나 슬픔도 기쁨도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질문: 불교는 육도윤회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저는 윤회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생노병사가 있고 기쁨과 슬픔이 있어야 인생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육도를 벗어나 슬픔도 즐거움도 없으면 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 제 생각엔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마 윤회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단지 일종의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는 마치 한 사람이 따뜻한 방안에 앉아서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유리창을 통해 바깥에 눈바람이 휘몰아치고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을 보고는 바깥도 괜찮네. 별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생은 괴로움이고 윤회는 큰 고통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고성제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하나의 진리이자 하나의 사실입니다.

 

만약 경험이 좀 적어서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없으면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할 때는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기 때문에 생노병사가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고, 자신에게 병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병이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노쇠현상을 직면하고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질병을 직면할 때, 당신더러 병원에 가서 창자를 자르고 호스를 꽂고 화학 치료를 받고 심신에 엄청난 변화를 겪으며 적응을 못하고 한 번·두 번·세 번 계속 반복을 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정신이 우울하여 밤에 잠을 잘 수 없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런 허울 좋은 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간단한 병고에 불과합니다. 그럼 죽음이라는 거대한 위협에 직면했을 때는요? 하물며 나중에 지옥에 떨어지게 되고 끝없는 육도윤회를 해야 하며 삼악도에서 영원히 벗어날 기약이 없다면요?

 

한 번은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자신에게 지옥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해달라고 했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만약 내가 말할 수 있고 또 누군가 들을 수 있다면, 이 사람은 당장에 심장이 파열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공포로 인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보겠네”, 부처님께서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들고 아난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국가를 배신한 죄를 지어 국왕에게 잡혀 아침에 그의 몸에 백 자루의 창을 꽂는다면,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아난이 답하기를 그럼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입니다라고 하였지요.

 

  “점심때가 돼서 국왕이 보니까 아직 죽지 않은 거야. 그래서 다시 백 자루의 창을 꽂으라고 하였네아침에 백 자루 창을 꽂았기에 그 사람의 몸에는 온전한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점심때 그 상처위에 다시 백 자루의 창을 꽂은 것입니다. 밤이 돼서 보니 아직 죽지 않았기에 다시 상처투성이인 몸에 다시 백 자루의 창을 꽂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자네가 보기엔 이 사람의 고통은 어떠할 것 같으냐?” “아이구, 이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의 이런 고통은 단지 이 작은 돌멩이만큼 크고 지옥의 고통은 수미산보다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드신 하나의 비유입니다. 사실 이런 비유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였기에 우리는 여전히 지옥의 고통이 어떠한지, 윤회가 어떠한 고통인지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경책해야 합니다.

 

  그리고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에 관해서는 이것은 우리 자신이 여기서 망상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것은 마치 무료하여 아무 일도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런 불생불멸·열반적정은 모든 번뇌를 제거하여 얻은 심신의 대자유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불생불멸·열반적정)가 바로 일체 만법의 근원이고 진리의 본체에 계합한 것이며 일종의 대자유·대해탈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지금 외출을 해서 차를 타려는데, 차를 타면 교통사고·교통체증이 있을 수 있고 교통피로도 있을 수 있지만, 차를 타지 않으면 또 안 됩니다. 만약 불보살이 되면 법신은 일체 처에 편만해 있어서 일념 사이 어떤 곳도 도달할 수 있고 동시에 모든 곳에 편재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심지어 우리 범부들은 심지가 저열하여 저는 그런 신선과 같은 생활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불성에 본래 갖춰진 기능입니다.

 

  따라서 성불·열반을 상락아정이라 부릅니다.

 

은 항상하다는 것입니다.

 

은 일종의 큰 즐거움으로, 법희·법성의 낙입니다. 이런 낙은 애심으로부터 기쁨으로부터 자비로부터 나온 것이고, 우리 불성 자체에서 구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간의 잘 먹고 잘 마시는 그런 감각적 낙, 또는 예술적인 향수·선정의 낙이 아니라 모두 완전히 이런 것들을 초월한 것으로, 당신은 꿈도 꿀 수 없고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입니다.

 

  당신이 말한 그런 슬프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은 일종의 무료하고 번뇌의 상태이므로 당연히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역시 불법으로써 자신의 관념을 잘 조절해야 합니다.

 

  또 말하기를 생노병사가 있고 기쁨과 슬픔이 있어야 인생도 의미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감각적인 느낌입니다.

 

  우리가 생노병사를 느낄 수 있고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배후에 불성의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불성이란 곧 각성覺性을 말하는 것인데, 불은 깨달음(覺悟)이라는 뜻입니다.

 

  겨우 이런 천박하고 심지어 잘못된 분별념의 느낌마저도 당신은 의미가 있다고 느끼는데, 그럼 각성의 근원을 깨달아 증득한다면 근본적인 존재를 소유하게 된 게 아니겠습니까? 이래야만 모든 의의의 근원을 찾은 것입니다.

 

  만약 겨우 감각적은 측면에서 이게 얼마나 좋고 의미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여전히 부족한 것이고, 그것은 일종의 천박한 인식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극락왕생해서 성불을 하면 이런 각성의 기능이 축소되고 사라져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아서 무료하다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각성의 기능이 철저해지고 원만해지고 아무런 장애 없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체 만법에 대해 사실상 이미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초월하고 이원적 상태를 초월한 것입니다.

 

  마음은 광대한 바다가 하늘의 뭇별들을 비추는 것과 같아서, 일체 만법과 일체 중생의 마음의 움직임과 생멸 현상들이 전부 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런 , 풍부함의 정도와 깊이 들어간 정도와 이런 광대원만하면서도 자재무애한 정도는 조금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간에서 이 있으면 불각不覺도 있게 되어 주객 이원의 대립이 있게 되고, 그 다음엔 온갖 분별과 전도가 생기게 되는데, 이런 과실들은 정토에 왕생하면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므로 많은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컨대 우리의 눈으로 봤을 때, 색맹이 본 뿌연 세상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마음속이 맑고 상쾌하게 하며 느낌이 좀 더 좋게 할까요? 아니면 눈이 깨끗하고 시력도 좋아서 갖가지 채색의 세상을 볼 수 있는 이런 느낌이 더 좋을까요? 틀림없이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아니면 또 우리가 연로하여 눈이 침침해져서 무엇을 보든 잘 보이지 않는 것과 시력이 특별히 좋아서 섬세한 부분까지 통찰할 수 있는 것을 비교하면 어느 느낌이 더 좋을까요? 틀림없이 후자일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세상 만법에 대한 여러 가지 느낌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육도윤회를 벗어난 성자·보살의 이런 느낌들은 안·····의 육근 중의 어느 근이든 우리와 비교하면 전부 같은 급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량한 급수를 초월한 것이지요.

 

  따라서 만약 당신이 나의 이러한 인생의 느낌이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만약 당신의 이런 논리(우리는 이런 수준밖에 안 됩니다)대로라면 당신이 육도윤회를 벗어난 후에는 이런 느낌의 진실성과 만족도는 당신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억만 배를 초월할 것입니다.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음이 마치 돌멩이와 같고, 혹은 너무 무료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출처/純淨時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