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는
수행자는 행실을 엄정히 해야 한다.
"향상일로向上一路)는 천성(千聖)도 전하지 못한다.
마치 큰 불덩이와 같으니,
누가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볼 수 있으며,
독을 발라둔 북과 같으니 누가 능히 귀를 귀울여
들을 수 있겠는가.
근기가 번개불보다 날쌔더라도 이미 더딘 것이며,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통했더라도 오히려
광견(狂見)이다."
"그러나 법을 주관하는 자가 강종의 안목을 써서
자세히 사람을 살피지 않고, 한갓 수박 겉 핡기
식으로 인재를 가린다면,
속선(俗禪) 중에 두 가지 갈림길이 있게 된다.
주인공으로 선을 삼는 자는,
행동과 동작을 주재하는 것으로 불조의 대기대용이라고
하면서, 따를 것도 어길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인 것,
'이를 작용이 성(性)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흐리멍텅한 생각으로 인하여 습기가
자기도 모르게 인발하여, 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을
상관치 않고 파계와 정계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
대도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나무라면
'어리석은 자여, 어찌 불성이 둘이 있으랴' 하고 말한다.
이런 자는 악업으로 마업(魔業)을 이룬 자라 할 것이다.
공(空)에 빠진 것으로 선을 삼는 자는 본래 한 물건도
없어서 아무것도 없고 텅빈 것으로 자신의 안신입명
(安身立命)으로 여기면서,
부처도 조사도 없어서 모든 것이 공한 것,
이를 '향상의 실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고 생각한다.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으로 인하여 사견이 틈을 타고
들어와서 마침내 다른 사람의 비방도 꺼려하지 않게 되고,
죄와 복도 돌아 보지 않으면서 안하무인의 거친
행동을 하게 된다.
누가 꾸짖으면 '못난 자여, 아직도 그런 것이 있는가?' 한다.
이런 자는 무지선(無知禪)으로 인과를 무시하는 자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는 비록 학인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또한 스승의 허물이다. 그가 강종으로 학인을 단련하지
않고 그저 그림자만을 취하여 인정한다면 근기가
하열한 자는 사해(邪解)를 내어 법문에 화를 입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올바른 스승의 가르침인가?
도안이 통철 했으면서도 또한 행실을 소중히 여긴다.
비록 선지식(조실, 방장)이긴 하지만 매사를 대중과 같이 한다.
그의 몸은 청결하고 그의 뜻은 고상하다.
이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이 늦어서야 잠들며,
근고(勤苦)로 일생을 살아가신 선덕으로 모범을 삼아
금옥을 초개와 같이 여긴다. 도행이 안으로 충실하여 총림이
본받을 만하다. 이를 올바른 것이라고 부른다.
어떤 것이 올바르지 못한 스승의 가르침인가?
도안이 소광(踈狂)하면서 마음으로 행실을 우습게 여긴다.
한번 스승의 지위에 오르면 모든 일을 대중과 같이 하지 않고,
맛있는 음식이나 따뜻한 옷을 탐한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고 느긋하게 일어나며,
안일을 탐하는 것은 독술을 마시는 것과 같다는 말을
부질없는 소리라고 여기면서 집요하고 고집스럽다.
이를 올바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대체로 선지식(조실,방장)의 삿된 행실은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수행이 용렬한 자에 지나지
않으면서 거짓 기백으로 불법을 가장하여 불조를 꾸짖고
귀신을 호통치면서 함부로 임제나 덕산에 견주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법문의 책임을 맡은 자는 옛 성인과 같은 신통은
없으면서 한갓 그들의 자취만을 답습하고,
불조와 같은 영이(靈異)는 없으면서 그들의 형식만을
본받으려 하니, 어찌 사자 몸속의 벌레나 여우의 종자로
스스로 마군에 떨어져서 사람의 올바른 믿음을 잃게 하고
법문을 파괴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선지식이 잘못하여 제자가 본받게
되었고, 점차로 전해져서 마업을 이루게까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납자를 단련하여 후인의 표방이 되고
법문의 본보기가 되게 하려면 지(知)와 행(行)을
엄격히 하는 일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간화선 수행의 바람직한 방향....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