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마음 공부 - 10
반야심경과 마음 공부 - 법상스님
3. 경의 실천적 해설
제1품. 입의분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1장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이제부터 경전의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됩니다.
반야심경은 다른 경전들에 비해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논문이나 사설, 또는 그저 간단한 글을
보더라도, 글이라면 보통 서론, 본론, 결론으로 그 구성이
나뉘어져 있게 마련입니다. 그처럼 경전에도 대부분의 경전에
공통되는 나름대로의 구성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이라는 구조입니다.
서분이라고 하면 보통 '육성취(六成就)'라고 하여,
이 경이 설하여지게 된 연유를 여석 가지로 나타내고 있는 부분으로,
일반적인 글에서 본다면 서론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육성취는 신성취(信成就-여시), 문성취(聞成就-아문), 시성취(時成就-일시),
주성취(主成就-불),처성취(處成就-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등),
중성취(衆成就-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 등)오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 사용하는 말로 육하원칙(六何原則), 즉 언제(when), 어디서(where),
누가(who), 무엇을(what), 어떻게(how), 왜(why) 라고 하는,
소위 글쓰는 5w-1h원칙과도 흡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금강경 제 1분의 법회유인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음으로 정종분이 있는데, 이 부분이 바로 본론으로써 모든 부처님의
교설이 전개되는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유통분은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정종분에서 설하신 교법을 제자에게
부촉하여 후세에 널리 유전(流轉)되도록 하기 위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반야심경은 다른 경전과는 그 구조가
약간 다릅니다. 대부분의 경전에서는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하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서분이 맨 먼제 나오며
마지막에 유통분이 나오는데 비해, 반야심경은 앞뒤 서분과 유통분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인 정종분이 시작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60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경을 260자로 간추린 경전이기 때문에,
핵심만을 간추리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반야심경은 대승불교 '반야'의 진수만을 뽑아놓은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거대하고도 심오한 가르침이
시작될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첫부분이 중요합니다. 경의 제목이 중요하고,
또한 처음 시작되는 가르침이 중요합니다. 반야심경의 대의가 경의 제목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드러난다면, 그 구체적인 수행법과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히 드러낸 부분이 바로 이 부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인 것입니다.
앞에서 이 부분을 입의분이라 하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기에 앞서
입의분의 의미를 풀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제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액을 건너셨다.
1.관자재(觀自在)
불교를 잘 모르는 이들도 '관세음보살'이라는 명칭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불교를 믿지 않는 이들도, 어렵고 힘들 때면
의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명호(名號)를 부르는 것이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신앙이 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명호의 의미는 '세간의 음성을 관하는 보살'이라는
뜻으로, 사바세계의 중생이 괴로움에 처해 있을 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곧 구제해주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법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관세음보살'이라 부르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은 어떠한 인연으로 이름을 관세음보살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무진의 보살에세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약 무량백천만억 중생들이 여러 가지 괴로움을 받게 될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명호를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관하고, 모두 괴로움에서 해탈케하시느니라"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이 과연 어떤 분이기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부르고 신앙하고 있는 것일까요?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 바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입니다.
천수경(千手經)에서의 관세음보살이 반야심경에서는 바로 관자재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 두 이름 모두 범어 '아바로키테 스바라
보디사트바를 번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중국에 들어와 번역되면서,
처음에는 관세음보살로 불리었으나, 이후에 관자재보살로 바꿔 일컬어졌다고 합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아바'는 지킨다는 뜻이고, '로키테'는 본다,
관조한다는 의미로, 이는 '지켜본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스바라'는 자재하다, 자유롭다는 의미이므로 이름 그대로 뜻을 새기면
'자유 자재하게 지켜본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중생들의 온갖 괴로움과
액난에 대해 자유자재하게 지켜보고 살펴서 그들의 괴로움을 소멸시켜 주신다'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부모님께서 자식을 가만히 따뜻하고
자비한 마음으로 지켜보듯이 그렇게 중생들을 지켜보시는 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린 관세음보살의 어원에 담긴 속뜻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관세음)'는 의미는 나라는 주관과 객관계 일체의 경계를
온전히 바로 관함을 말하며, '보살'이라고 함은 우리 내면의 본래 자리,
깨달음 보살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하는 의미는 나와 내 밖의 일체 경계를 관하여
본래 면목 깨침의 보살자리에 온전히 방하착하고, 경계를 공양 올린다는
자기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 염불수행을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비롯한 일체 세간의 음성, 다시 말해 온갖 경계를
바로 관하고 그러한 모든 경계를 녹이고자 온전히 자기 내면의 보살자리인,
참 나 본래 자리에 놓을 수 있도록 하는 밝은 방편 수행인 것입니다.
세간의 음성, 즉 온전히 자신과 바깥 경계를 관하고 녹여 보살,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염불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염불(念佛)이라고 할 때, 염이란 우리네 마음속에서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갖가지 생각, 마음의 조각들을 말하며 불이란 우리네 마음 속에
저마다 갖추고 있는 본래 자리, 근본성품, 참나 주인공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염불은 우리 마음 '염'과 부처님 마음'불'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하는 밝은 수행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세음보살 염불수행의 공덕을 살펴보기 위해,
<관음경>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우리의 온갖 괴로움에 마땅히 몸을 나투어 안락을 주신다고 합니다.
굳은 믿음으로 관세음보살 명호를 지극 정성으로 염불하면 어떤한 일도
모두 성취할 수 있다고 <관음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어떠한지 <관음경>의 구절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큰 물에 떠내려가더라도 그 이름을 염하면 곧 얕은 곳을 얻게 되며,
또 도적으로부터 해를 입게 되었을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하면
그들이 가진 칼과 무기가 조각조각 부서져서 벗어나게 되느니라.
또 어떤 사람이 수갑과 고랑과 칼과 사슬이 그 몸을 속박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하면 모두 부서지고 끊어져서 벗어나게 되느니라.
어떤 중생이 음욕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음욕을 여의게 되고, 만일 성내는 마음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성내는 마음이 없어지며, 만일 어리석은
마음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어리석음을 여의게 되느니라.
이렇게 되는 도리가 있습니다. 명호를 지극한마음으로 염불하였을 때
이렇게 되는 도리 말입니다. 다만 이러한 경전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번 행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형상을 가진 관세음보살님께서 하얀 선녀복을 입고 나타나셔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그런 형상을 가진 분으로서의
관세음보살님을 불러서는 안 됩니다.
관세음보살이란 앞에서 말했듯이 내면에 있는 '참나'를 의미합니다.
다만 가만히 내면 깊은 곳에 숨어만 있는 참 나 주인공이 아닌 적극적으로
세간의 음성을 관하여 온갖 경계를 밝게 녹여줄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본래
면목 참성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관세음보살을 염불한다 함은
'관세음보살님 어서 와서 내 괴로움 좀 가져가 주세요'하는 의미가 아니라
내 스스로 세간의 음성, 온갖 경계를 관하여 내면의 본래 면목 보살자리에
공양 올려 밝게 닦아가겠다는 자기 수행에의 철저한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며,
내 안의 관세음보살님을 굳게 믿어 내면의 주장자를 밝게 세우겠다는 철저한
대장부 수행자의 정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염불하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와 자력,
수행력과 보리심이 없고서는 결코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염불수행입니다. 그러니 염불수행 또한 타력이면서 동시에 온전한
자력수행이기도 한 것입니다. 보살님의 명호를 염불하며 보살님 마음을
연습하는 일이니 자력과 타력이 동시에 하나가 되는 참으로 밝은 방편수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세음보살 방하착 염불수행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참자성'을 향한 일심염불입니다. 괴로움(苦)의 원인인 일체의 모든 끄달림,
애욕과 집착(執)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비워버려(道) 해탈(滅)로 안내하는
사성제의 실천행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관세음보살의 명호로 돌아와 관세음보살 이외의 다른 명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은 참으로 많습니다.
몇 가지만 살펴본다면 중생세게 일체의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을 베푼다고 하여
'시무외자(施無畏者)라 하고, 대자대비를 근본서원으로 하는 보살이라 하여
대비성자(大悲聖者)라 하며,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구제하므로 구세대사
(救世大士)라고도 합니다. 또한 이 보살은 세상을 교화함에 중생의 근기에
맞게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므로,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는데,
이러한 모습을 법화경 보문품(法華經 普門品)에서는 삼십삼화신(化神)이라고
푠현하였으며, 능엄경(楞嚴經)에서는 삼십이응신(應身)이라고 합니다.
이는 모두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나타내는 변화신(變化身)입니다.
이러한 변화신에는 부처님, 성문, 연각 등을 비롯하여 범천, 제석, 장자,
거사, 스님, 신도, 동자, 아수라 등이 포함되어 있으니,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모습으로도 우리 곁에 기꺼이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많은 이들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방편따라, 중생들의 각기 처한 입장에 다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대상으로
마땅히 몸을 바꾸어 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미타 부처님의 좌우 보처보살(補處菩薩) 중
한 분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우처보살이 대세지보살이시고,
좌보처가 바로 관세음보살이십니다. 또한 수많은 부처님을 출현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하여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佛母) 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자비'를 그 근본행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비의 화신이라 불리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慈)라는 것은 '베푼다'는 뜻으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말하며,
비(悲)는 본래 '슬프다'는 뜻인데, 불법 문중에서는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 주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자비의 실천이야말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아무리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이 모두는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 둘이 아닌 연기(緣起)의 관계 속에서
나온 즐거움이므로 마땅히 나 혼자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함께 베풀어 주려는 마음을 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의 진리를
알기 때문에, 베풀어 주었지만 베풀었다는 상(相)을 내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는 이라면 자연히 자비를 실천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렇게 연기의 이치를 깨달아 '지혜'롭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는 따로 관세음보살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관세음보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