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마음 공부 - 19
반야심경과 마음 공부 - 법상스님
경의 실천적 해설
5. 조견(照見
조견이란 '비추어 본다'는 의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라고 하면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이나 어떤 상(相)을 짓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관찰이기도 합니다. 부처님도 바로 이 현실의 조견을 통해 확연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팔정도의 정견(正見)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세계라든가, 절대자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셨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깨달음은 전적으로 현실에 대한 비춤,
즉 조견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나'에 대한 조견, '현실'에 대한 조견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자의 바른 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 그리고 '현실'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나와 내 밖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봄(조견)으로써
나와 내 밖의 현실이 어떠한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떠한 법칙성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는지,, 어떤한 성질,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불교 교설이라고 하는 연기법, 삼법인, 오온, 육근, 십이처,
십팔계, 업, 윤회, 사성제, 팔정도, 사념처 등 이 모든 교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고타마 싯다르타의 현실(일체, 제법, 우주, 세계)에
대한 올바른 관찰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가만히 관찰해 봄으로써 연기법이라는 현실의 법칙을 조견할 수
있었고, 그 연기법을 통해 현실의 속성, 성질인 삼법인의 교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또한 현실의 구성 방식을 가만히 비추어 보니 우리의 신, 구, 의 3가지로
행한 행위가 업이 되어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의 법칙, 현실의 성질, 현실의 구성 방식에 대하여
조견하시고는, 그렇다면 현실, 일체, 제법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비추어
보셨습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는 교설이 바로 현실의 모습, 일체 제법,
다시 말해 불교의 우주관 세계관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비추어
보신 결과, 오온이 모두 공함을 깨달으셨습니다. 즉 조견의 결과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삼법인의 무아의 교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비추어 보신(照見) 가르침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우선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근본불교의 가르침의 전반적 교설을
알고 있어야, 이것이 대승불교의 반야 공 사상에 와서 오온개공이라는
짧은 경구로 표현된 연유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근본불교의 교설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만 대승의
공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대승의 공 사상이 근본교리를 부정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는 다만 시대적 배경과 현실 상황에 따라 겉모습만 잠시 달라진 것일 뿐
그 가르침의 본질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며,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 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현실의 조건
그러면 여기서 불교의 근본교설, 다시 말해 기초 교리를 체계적,
유기적으로 정리해 보고 넘어가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래야만
앞으로 나오게 될 반야심경의 모든 가르침에 대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언뜻 보기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근본 교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색수상행식(오온)을 부정하고,
안이비설신의(육근)와 색성향미촉법(육경)을 부정하며 십팔계, 12연기,
사성제를 비롯하여 깨달음까지를 부정하여 어디에도 얻을 것이 없다는
무소득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습니다. 물로 이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닌 삿된 것을 파하고 오히려 밝은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파사현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은 이후에 따로 설명할 것입니다. 여하튼 이러한
반야심경의 본문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근본 불교의 교설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보통 10년, 20년 아니 평생을 두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해 온 사람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명확하고 체계적인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의례히 부처님의 법이라고 하면 연기법이고,
삼법인이며, 사성제, 팔정도, 오온, 십이 연기, 십이처, 업, 윤회가 있다고
근본불교 교설을 중구난방 식으로 나열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설이 불교의 핵심 사상이라고 한다면 과연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괴로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는지 등등의 문제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작업, 그리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체계가 잡혀야만 이후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중관(中觀), 유식(唯識),
밀교(蜜敎), 천태(天台), 화엄(華嚴), 선(禪), 정토(淨土) 사상 등의 역사적 전개를
공부해 나아감에 있어서 교리의 역사, 즉 불교 사상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헤매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체계를 토대로
반야심경의 공 사상을 살펴보아야만 공사상의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음 강의에는 근본교설에 대한 개략적이고 체계적인 정리를 해 두고,
그 뒤에 반야심경 본분을 공부하며 좀더 자세한 교리의 실천적인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1)연기법 - 현실의 법칙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는 어떤 절대자에 의해서 주어진 깨달음이 아니요,
'나' 밖에서 얻은 소극적인 깨달음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자기 자신의
의지로 '나'와 나 밖의 현실 그 자체를 여실히 관찰하셨고, 그로 인해 현실이
어떤한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깨달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관찰함으로써(正見)
비로소 현실이 어떤한 규칙, 법칙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셨던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복잡하고 불규칙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현실세계가
깨달음의 밝은 혜안(慧眼)으로 보니 모두가 철저히 규칙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음을 아셨습니다. 우연히 일어나거나, 숙명이라거나,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이란 결코 있을 수 없음을 여실히 아셨습니다.
이 사실이 바로 연기의 법칙인 것입니다.
일체 모든 존재는 0.1%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그럴만한 인과 연이 서로
화합하여 일어나고, 멸할 때도 마찬가지로 인연이 다했으므로 멸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의 핵심이라
하며 '연기를 보면 부처님을 본다'고 한 것입니다.
2)삼법인 - 현실의 속성
이와 같은 현실의 관찰을 통해서, 현실은 연기법이라는 법칙으로 인해
모든 존재가 역동적이고도 박진감 넙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다만 연기법의 확신에서 그치는 단편적인 교설이
아닙니다. 연실이 연기법이라는 법칙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현실이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려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현실의 속성, 일체 제법의
속성은 과연 어떠한가?
일체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생(生)하고 인과 연이 다하면 멸(滅)한다는
진리는, 이 세상 어떤 것도 항상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과 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이 인과 연의 화합이 다하면 반드시 어떠한 존재도
멸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어떠한 존재도 반드시 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현실의 첫번째 속성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입니다.
이렇게 일체 제법은 어떠한 것도 항상하지 않으며(無常), 반드시 언젠가는
멸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실이 의미하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유추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존재도 '나다'라고
할 만한 고정된 아(我)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는
인과 연이 화합하여 잠시 일어난 존재일 뿐이며, 인과 연이 다하면 언젠가
반드시 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고정된 '나'가
아니고, 연기된 존재로서 인연 따라 잠시 만들어진 나, 거짓된 나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현실의 두 번째 속성을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생명 있고 생명 없는 모든 존재는 다만 그럴만한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고, 인과 연이 다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항상하지 않는
무상(無常)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다' 하고 내세울 것이 없는
무아(無我)의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우리의 현실은 바로 고(苦)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언가 항상할 때 행복이 있고, 내가 있을 때 행복한 것이지 무상하고
무아인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대재벌의 아들, 딸이라고 해봅시다.
분명히 누릴 수 있는 것을 대부분 누릴 수 있으며, 그렇기에 행복에 젖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기업이 부도가 나서 그야말로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요즘도 실제로 이러한 일로 자살을 하는 경우까지 종종 신문지상에 오르곤
합니다. 이것은 '돈'이라는 것이 항상하리라(常) 생각하며, 내 돈(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생각이 무너졌을 때 오는 불가피한
괴로움(苦)입니다.
이렇듯 연기하는 세계는 무상하고 무아이므로 다음에 올 수밖에 없는
존재의 속성은 괴로움(苦)인 것입니다. 이것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하는 것입니다.
3)오온, 십이처 - 현실의 구조
지금까지 현실을 움직이는 근본 법칙과 현실의 속성을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현실에 대하여 살펴보았지만, 그렇다면 과연 '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일어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중생들의
의문에 좀더 자상한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현실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일체(一切)라고도 하며, 제법(諸法)이라고도 합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이 세계, 이 우주 전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을 보는 안목을 요즈음 용어를 사용해 표현하면 우주관, 혹은 세계관이라
하겠습니다. 요즘 현대과학의 우주관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지만,
과학이 만들어낸 우주관은 아주 커다란 오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 이 우주를 바라봄에 있어
단지 물질적인 것만을 측정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듯이, 불질세계의 법칙을 알아내고 관찰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에 약간의 정신세계가 들어가면 과학에서는 혼동이
되고 맙니다. 불규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세계까지 포함하여
생각한다면 전혀 혼동될 수 없는 인과 연의 지극히 규칙적인 연기로써의
'진짜 과학', '참 과학'이 됩니다. 이러한 연기로써의 규칙적인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계(法界)라고 부릅니다.
불교에서는 바로 지금(시간), 이 곳(공간)에서의 '나'를 중심으로 일체 세계,
우주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현실이라는 것은 바로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온(五蘊)과 십이처
(十二處)의 교설입니다. 오온이라고 하면 색(色), 수(受), 상(相), 행(行), 식(識)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물질세계는 색으로 간단히 표현되는 반면에, 정신세계는
오히려 더 많은 비중을 두어 수, 상, 행, 식으로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십이처라고 하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
(六根)과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인 육경(六境)을 말하는
것으로써, 육근은 인간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을 말하는 것이고,
육경은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라고 하는 육근의 감각기관에서 느낄 수 있는 대상만을 일체의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감촉을 느낄 수 있고, 의지로 생각할 수 있는
영역만을 일체 제법인 현실의 세계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우주관을 내세우고 있으며, 우리의
육근, 즉 나를 중심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4)업과 윤회 - 현실의 존재방식
이상과 같은 현실이 엄연한 진리로 당당히 버티고 있지만 우리의 온갖
분별 사량심은 도저히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기(緣起)의 진리를 알지 못하므로 나쁜 짓을 하고도 그 과보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며, 피해가길 바라고, 무상(無常)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에
내 육신, 내 재산, 내 명예에 집착하여 그것이 멸할 때 괴로움에 빠지게 되고,
무아(無我)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마음대로 한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온갖 나를 위한 이기심을
키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으로
인해 우리는 '나다'라는 생각에 갇혀 몸과 말과 뜻으로 나를 위한 이기적인
행위를 짓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身), 구(口), 의(意)로 세 가지 어리석은
행위를 지음으로 인해 우리는 그에 합당한 결과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업(業)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하여 언젠가 우리에게 과보를 가져다 주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짓는 모든 행위가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을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업(三業)은 우리의 삶을 윤회의 수레바퀴로 몰아 갑니다.
업을 짓기에 그 업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 하고, 과보를 받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지은 없의 종류에 따라 여섯 갈래의 길(육도 六道)을 언제까지고
돌고 도는 것입니다. 착한 행을 많이 하면 선업(善業)을 받아 내세에 천상이나
인간 중에도 좋게 태어나고, 악업을 많이 지으면 내세에 지옥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윤회의 세계는 크게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이 그것입니다. 선한 업을 지은 과보는
천상이며, 악한 업을 지은 과보는 지옥입니다. 그리고 탐, 진, 치 삼독심에 따라서
탐냄을 많이 일으킨 사람은 아귀가 되고, 성내고 화를 잘내는 사람은 아수라에
나며, 어리석은 과보는 축생의 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계는 지옥, 천상, 아귀, 아수라, 축생의 모든 존재들이 공존하는
세계입니다. 인간의 세계에는 선하고, 악하고, 탐내고, 성내고, 욕심내는 등의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고, 같은 사람일지라도 어떨 때는 선하고, 또 다른 때는
악하며, 성내기도 하고, 탐내기도 하고, 어리석은 행위를 짓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계에서만 업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다른 다섯 가지의 세계는
다만 과보를 받는 세계일 뿐입니다. 그러니 다음 생에 수행하고, 다음 생에
복 짓는다는 생각은 가당치도 않은 말일 뿐입니다. 오직 지금, 여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오로지 현실의 조견을
통해 현실의 법칙과 속성 그리고 현실의 구조와 존재방식을 여실하게 비추어
보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