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마음 공부 - 28
반야심경과 마음 공부 - 법상스님
파사분
3.무상과 무아의 연기적 이해
(1)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존이시여, 자주 '무상, 무상' 하시는데, 무엇을 무상이라고 합니까?"
"라타야, 우리들의 신체(색)는 변한다. 우리들의 감각(수)은 변한다.
우리들의 표상(상)은 변한다. 우리들의 의지(행)는 변한다. 우리들의
의식(식)은 변한다. 라타야, 이같이 관찰하여 일체를 떠나라.
일체를 떠나면 탐욕은 없어지고, 탐욕이 없어지면 해탈할 수 있다.
해탈하는 그때, 미혹된 삶은 끝난다."
제행무상이란 색수상행식 오온은 모두가 변한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오온이란 우리 몸으로 본다면 육체(색)와 정신(수상행식)을 이르며,
나아가 일체 만유를 분류하는 분류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온이란 '나'라는 소우주와 '일체'라는 대우주를 의미하며,
일체만유, 삼라만상이라고 표현되는 전체 우주법계를 의미합니다.
앞으로 반야심경 강의에서 좀더 자세한 부연 설명이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조금 줄이기로 하고, 쉽게 말해 일체가 다 항상하지
않고 변한다는 이치를 말합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가 변한다고
관찰함으로써 일체 모든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체를 떠나게 되면 탐욕이 있을 수가 없게
마련입니다. 탐욕이 없어야 해탈을 하는 것이며, 그때 어리석은
삶은 끝난다는 말입니다.
제행무상이란 앞에서 공부했던 연기법에 대한 시간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재를 시간적으로 볼 때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지금은 항상하는 것 같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제행이란 '일체의 만들어진 것', 다시 말해 '인연 따라
생겨나 생멸변화하는 유위(有爲)의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존재, 모든
현상'을 가리킵니다. '모든 존재' 혹은 '모든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상이란, 글자 그대로 '항상함이 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일체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정견(正見)할 때, 가장 먼저
그러나는 존재의 속성은, 바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가장 평범한 진리인
것입니다.
존재란, 여러 요소들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임시로 모여 있는
집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와 조건들이
변하거나 사라지면서 존재 역시 변하거나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연기법인 모든 존재는 연기하기 때문에 인과 연에 의하여 생성되고,
인과 연이 다하면 소멸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크게는 태양계를 보더라도 태양을 중심으로 많은 행성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으며, 작게는 우리들이 정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작은
물체들 또한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끊임없이 움직이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수많은 분자가 모여 이루어졌으며, 그 분자들은
다시 수많은 원자들이 결합된 것이라 합니다. 분자는 온도나 주위
환경의 열 진동에 보조를 맞춰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를 보더라도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와
중간자가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진 운동체임이 밝혀졌습니다.
한시도 중단함이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한다는 말이지요.
더구나 원자핵이라는 것도 양자와 중성자가 극히 좁은 공간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물질을 비롯한 일체 만물은 마치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모든 존재의 모습이 무상하다는 제행무상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과학은 이처럼 부처님이 진리를
증명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이며,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다.' '현대 과학에 결여된 부분을 메워
주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교이다.' 라고 말한 거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권세와 명예,
그리고 돈 등,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영원히 있을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대기업 회장이라도 돈 많고
권세를 누리며 살겠지만, 우리와 똑같이 먹고 자고 느끼며 살고
그러다가 죽어갈 뿐입니다. 나이가 들면 그 또한 인생에 대한 인과 연이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독재 정권을
아무리 길게 한 나라라 해도 어느 시점에 가서는 붕괴되고 마는 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제행무상이라는 말입니다. 언제까지고 내 곁에
있어 줄 것만 같은 사랑하는 이 또한 언젠가는 떠나가게 마련이고,
그렇치 않더라도 그에 앞서 내 마음에서 처음 가졌던 사랑하는 마음은
어떻게든 변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나'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육신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늙고
병들어 결국엔 죽어갈 것입니다. 처음 태어날 때 잘생긴 외모를 받았더라도
살아가며 어떻게 마음을 쓰고 닦았느냐에 따라 외모 또한 변해갑니다.
우리 몸의 세포로 말한다면 순간 순간 끊임없이 나고 죽고 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숱한 생멸을 반복할 것입니다. 성격이 나일 것 같지만 성격
또한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날 적부터 가진 능력과 재능은
항상 할 듯 하지만 나의 노력과 닦음을 통해서 그 또한 계발할 수 있으며,
그런 능력이라도 그저 방치해 두기만 한다면 소멸하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은 변한다'라는
그 진리일 것입니다. 변하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우린 돈이 항상 할 때
행복을 느끼고, 명예가, 권력이, 지위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 행복을느낍니다.
생명이 유지될 때 행복인 것이며, 사랑도 사랑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대상이
유지되는 동안 행복입니다. 명예와 권력이 박탈당할 때, 경제력을 상실했을
때, 사랑하는 이와 헤어졌을 때, 죽어갈 때..... 그때까지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항상하지 않는다'는 제행무상의 이치 속에서 본다면, 당장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다가올 괴로움을 전제로 한 그런 잠깐 동안의
행복을 느끼며 그 행복에 빠져 있는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니 중생의 소견을
어리석음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죽을지 뻔히 알면서, 변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지금 당장의 작은
달콤함에 빠져 생사의 문제, 제행무상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잠깐의 행복에만 안주하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전도된 몽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한다'고 하니 이와 같은 불교의 근본 진리가 허무주의를 의미하는
듯한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 '인생은 무상하다'라는 한탄스런 말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상하다'는 말은 허무주의를 의미하는 바가
아니요, 단지 항상 변해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 데 대한 결과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무상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변하기 때문에 이이들이 어른이 되고, 병든 사람은 건강을 되찾을 수 있고,
악한 사람이 착하게 발심할 수 있으며, 지금은 가난한 사람이 다시 부귀를
누릴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열심히 수행정진하여
다시 지혜로워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무상의 진리는 허무주의적이고, 괴로운 진리로 잘못 생각할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돌려서 받아들여, 무상한 가운데
우리의 삶을 올바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변함'이라는 그 자체는 그렇기에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작은 분별심으로 재어 볼 잣대가 아니란 말입니다. 제행무상이란
그대로 진리의 모습, 존재의 여실한 모습일 뿐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항상하지 않고 변화해 간다는.....
(2) 제법무아(諸法無我)
"수루나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신체는 불변하느냐, 변하느냐?"
"세존이시여, 변하나이다."
"변한다면, 그것은 괴로운 것이냐, 즐거운 것이냐?"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변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관찰하여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본질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세존이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제법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현실세계의 일체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제행무상에서의 '제행'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무아'는 일상생활에서 '나'라는 행위의 주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형상도 다른 현상과 서로 의존하지 않으면서 완전히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차마'라는 비구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여러 비구가 병 문안을 왔다.
"어떤가? 견딜 만한가?"
"어찌나 아픈지 견딜 수가 없네."
그때 한 비구가 그를 위로하고자,
"세존은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지 않으셨던가?" 하니 차마는
"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한다네." 라고 대답했다.
여러 비구들이 따지고 들자, 차마는 말했다.
"벗들이여, 내가 '나'는 있다고 한 것은, 이 신체가 '나'라는 뜻은 아니라네.
또 감각이나 의식을 가리킨 것도 아니라네. 또 그것들을 떠나서,
따로 '나'가 있다는 의미도 아니네. 벗들이여, 예를 들면 꽃의 향기와 같다네.
만약 어떤 사람이 꽃잎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을 옳다고 하겠는가?
줄기에 향기기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을 옳다고 하겠는가? 또는 꽃술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역시 향기는 꽃에서 난다고 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과 마찬가지로, 신체나 감각이나 의식을 '나'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그것을 떠나서 따로 나의 본질이 있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네.
나는 그것들의 통일된 형태를 '나'라고 하는 것이라네."
무아라는 말은 '아(我)가 없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즉 고정불면한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라는 상을 깨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상이 없는데, 내 것이라는 것과 '내가 옳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나다'라고 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으며 한결같은
속성인 상일설(常一性)이 있어야 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재성(主宰性)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나'고, 내일도 '나'로 항상해야 참된 '나'라고
할 수 있지 늘 변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찌 '나'라고 할 수 있겠으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그것을 어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 속성, 즉 상일성과 주재성을 가져야 '나'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항상하지도 못하며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며 100년도 못 되어 완전히 변화되어 결국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이렇든 항상하는 상일성이 없으므로 무아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몸뚱이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서라도
결정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내 마음'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내 마음 기쁘고 싶다고 기쁠수 있습니까,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인연 따라 그렇듯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우리 마음이 행복, 불행, 고독, 허탈 등등의 마음을 오고 갑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이처럼 상일성도 주재성도 없는 텅 비어
있고 실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상일성과 주재성이 없는 '나'는 더 이상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아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무아라고 하여,
현재의 나, 현상적인 존재로서 이렇게 활동하고 있는 나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나'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아의 진리는 연기의 공간적인 표현이며, 내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내면적이고 공간적인 관찰인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모든 존재는 항상함이 없는 무상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하지 않는 존재, 연기하는 존재를 가지고 '나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연기하기 때문에 무상이며, 무상이기 때문에 무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공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로병사하고, 일체 제법이 생주이멸하는 마당에 어느 무엇을
잡아 '나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마치 불교는 '나'를 무시하는 종교이며 염세적인 종교가
아니냐고 할지 모르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아라는 것은, 인연 화합되어
끊임없이 변화되는 존재라는 것이며, 그렇기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현상계의 본질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오온무아(五蘊無我)라고 하여, 무아를 설명할 때 오온이 무아임을
설명합니다. 앞에서 인간, 혹은 일체 만법을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는 제각기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오온무아의 교리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잇는 요소들을 하나 하나 분석하면서 우리 존재가 '무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 일체의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잠시 만들어지고 만들어진 순간에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렇게 인연이 다하게 되면 결국에는 소멸되어 없어집니다.
지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잠시 인연의 나툼일 뿐 고정된 실체로서
항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법으로 이루어진 일체 제법은 항상하지 않으므로
무상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이며, 인연 따라 생주이멸, 생노병사하므로
연기이고, 그러므로 있다 없다 할 수 없어 공이며 중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일체 제법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세상 그 무엇을 집착하며 소유하려
할 것입니까. 집착할 것이 없다면 세상은 그대로 고요하며 스스로 마음의
온전한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제법무아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많이 들어 지혜로운 제자들아.
이 오온은 '나'가 아니요,
'나의 것'이 아니라고 관찰하라.
이와같이 살펴보면 이 세상에 취할 것이 없게 된다.
취할 것이 없다 함은 집착할 것이 없다 함이다.
집착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야
스스로 마음의 평화(열반)를 깨닫는다.
(3)무상, 무아의 실천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은 단순한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은 무상, 무아를 터득하기 위해서
공동묘지(강가의 화장터)까지 찾아가서 썩어가는 시체를 앞에 놓고
명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인도에서는 강가에 나무를 한 단 해 두고는
죽은 시체를 태우는데, 대부분 가난해서 나무를 충분히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몸뚱이가 다 타기도 전에 화장 의식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타나 남은 시체가 강의 여기저기에 팔 한 짝, 다리 한 짝씩 둥둥
떠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수행자들은 그러한 시체의 모습을
바라보며 무상과 무아의 이치를 관하는 수행을 하는데 이를 백골관법
(白骨觀法)이라고 합니다.
백골관법은 아직까지도 소승 불교국에서 실천되고 있다고 합니다.
타일랜드와 말레이시아 등지에는 현대식의 건물과 시청각 교육시설까지
완비한 최첨단 사찰이 울창한 정글 속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그 중 한 절의 법당 앞에는 생물시간에나 봄직한 해골이 인간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 있다고 하는데, 그 옆에 있는 명찰에는, '1930년 미스
타일랜드의 실물'이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그 나라에서는 더러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몇십 년 전, 그 나라의 제일 가던 미인의 모습을 법당 앞에 세워두고,
매일 드나들며 바라보면서 무상과 무아를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정도라면, 그 사찰의 수행자들은 미인을 보고 집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선방에는 흉측한 미이라가 서 있다고 하는데, 피부와 모발도
변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사람의 형상으로 두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 방에서 함께 참선하던 스님인데, 몇해 전에 병으로 죽은 후
그대로 세워 놓았다는 것입니다. 몇해 전까지 함께 수행하던 도반의
죽은 모습을 보며, 무상과 무아를 터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에 죽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제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올바로 알아 지금 이 순간부터 죽음을 준비하는 생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수행을 할 때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지금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나중에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 좀 벌어 놓고, 자식들 좀 가르쳐 놓고, 나이 좀 들어서
등등 수행하기 좋을 때를 기다리기만 합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언제
어느 순간에 임종을 맞이할지 어찌 알겠습니까.
바로 지금, 최선을 다해 지성으로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을 해야, 언제 어느 때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이 생에 집착하지 않고 바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무상 무아의 진리를
올바로 안다면 이 생에 집착할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삶에 대한 엄청난 집착을 가지고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나다', '나는 항상한다'는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의 집착 때문에 죽고 나면 편히 갈 곳으로 가지 못하고,
이 생의 집착심으로 가볍게 이곳을 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괴로워 울고, 집착하면 영가가 편히 갈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상과 무아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아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무상과 무아를 닦아야 합니다.
항상함이 없는 줄 알아 소유와 집착을 끊을 일이며, 고정된 내가 없는
줄 알아 아상을 놓아버릴 일입니다. 수행자는 세상을 대할 때 이렇듯
무상과 무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상과 무아를 관하며 삶을 살아간다면 온작 집착과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며, 아상을 녹이고 하심하는 마음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명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무상과 무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무상의 눈, 그리고 무아의 눈....
늘 수행자는 그러한 두 가지 실상의 눈을 가질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