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마음 공부(법상스님)

반야심경과 마음 공부 - 37

혜월(慧月) 2021. 4. 12. 10:55

 

반야심경과 마음 공부 - 법상스님

 

파사분  4장

 

3.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1) 십팔계(十八界)에 대하여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십팔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팔계란 인간의 주관적 감각 기관의 요소인 안계, 이계,

비계, 설계, 신계, 의계와 객관적 대상의 요소인 색계, 성계, 향계, 미계,

촉계, 법계 그리고 감각 기관과 그 대상이 서로 만날 때 나타나는 

인식 작용인 안식계, 이식계, 비식계, 설식계, 신식계, 의식계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란 십팔계의 첫 번째 안계에서부터

십팔계의 마지막 요소인 의식계까지의 열여덟 가지 모든 요소를 

부정하는 말인 것입니다.

십팔계는, 앞에서 말한 십이처에 육식을 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식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관(육근)과, 인식의 대상(육경)과,  인식 작용(육식)의 3가지 요소가

필요한 것입니다. 십이처와 십팔계가 다른 근본적인 차이는,  마음의

영역에 여섯 가지 인식을 하나로 합하여 하나의 의식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눈, 귀,코, 혀, 몸, 뜻의 각각에 독자적인 인식 작용을 내세우고 

있는가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자가 십이처의 의처(意處)이며,  

후자가 십팔계의 여섯 가지 별개의 인식인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인 것입니다.

이처럼,  십팔계는 십이처에서 설명하였던 육근과 육경에 육식을

더하면 성립이 됩니다.  육근과 육경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육식에 대해서 좀더 자세한 언급이 된다면 십팔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식을 설명하기 전에 잠시 부연한다면, 

이러한 십팔계의 여섯 가지 식의 존재에 대한 연구와 함께 마음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거듭한 부파불교의 법에 대한 연구는 이후에 그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 마음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낳았으니,  

이것이 바로 유식(唯識) 사상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 체계적인 

유식 사상에 의거하여 육식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유식에서는 육식을

전5식(前五識)과, 순수한 정신 작용인 제6의식(第六意識)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유식 용어로 전오식이란,  근본불교에서 십팔계를 설명할 때 언급한

다섯 가지 구별,  분별하는 식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을 말합니다.

즉 안, 이, 비, 설, 신의 5근과 색, 성, 향, 미, 촉의 5경이 만날 때 나오는

다석 가지 분별 작용인 것입니다.  즉 눈으로 빛깔을 보았을 때 느끼는

분별심, 귀로 소리를 들었을 때 느끼는 분별심, 코로 향기를 맡았을 때 

느끼는 분별심, 혀로 맛보았을 때 느끼는 분별심, 몸으로 감촉했을 때

느끼는 분별심을 전5식이라 합니다.

이 다섯 가지의 분별하는 마음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첫째가 좋다는 마음, 둘째가 싫다는 마음, 셋째가 그저 그렇다는 마음입니다.

눈으로 모양을 보거나, 귀로 소리를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볼 

때, 그리고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 항상 이 세 가지의 마음 중 하나가 

일어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 하나 하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여섯 가지 의식(육식,六識)

 

1) 안식(眼識)

첫째, 안근(眼根)으로 색경(色境)을 바라볼 때 나오는 마음인 안식(眼識)을

보겠습니다. 불교 전문 용어를 사용하니 어려운 느낌이 들지만, 사실은 

쉬운 말입니다.  눈으로 모양이나 빛깔(색)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좋고,

싫고, 그저 그렇다고 분별하는 마음이 바로 안식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눈의 인식 대상은 색(色)입니다.  이것은 빛깔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희고, 검고, 파랗고, 붉은 등의 '빛깔'을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길고, 짧고, 모나고, 둥글고, 높고, 낮은 등의 '모양'을 의미합니다.

전문 용어로 하면 전자를 현색(顯色)이라 하고 후자를 형색(形色)이라 합니다.

눈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에는,  그 사물에 대해서 좋거나 싫거나 그저 

그런 마음이 생기게 마련인데,  이 분별하는 마음이 바로 안식인 것입니다.

안식으로는 사물의 내면에 있는 오묘한 마음까지는 분별하지 못하며, 오직 

현재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만을 인식하는 기초적인 분별 작용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내 앞에 꽃이 한 송이 있다고 가정해 보았을 때,  안식이 

의식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꽃의 색깔과 꽃의 모양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대변이 있다고 했을 때,  이 또한 색깔과 모양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에서는 꽃을 보면 직감적으로 좋아하고, 대변을 보면 흔연해 

하지 않는 기초적인 인식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이외에

이것이 꽃인가, 대변인가, 나아가 꽃이면 무슨 꽃인가,  그 꽃은 언제 피며,

어느 나라의 어느 지방에서 잘 자라는지, 무궁화라면 우리 나라를 상징하는

꽃이구나 정도까지 유추해서 의식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기능을 

위해서는 제6의식의 작용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이때 제6의식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 등을 생각해 내고,  다른 것들과 비교 판단하며, 때로는 잘못

인식하기도 하는 등의 구체적인 인식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재 드러난 것에 대해 눈으로는 모양과 빛을,  귀로는 소리를,

코로는 냄새를, 혀로는 맛을, 몸으로는 촉감을, 뜻으로는 생각들을

그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작용을 겉으로 드러난 것에 대해 분별한다고

하여, 유식에서는 '현량(現量)이라고 이름합니다. 여기에 좀더 깊고 오묘한

부분까지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6의식(第六意識)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머지 네 가지 식도 마찬가지입니다.

 

2) 이식(耳識)

둘째는 이근(耳根)으로 성경(聲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인 이식입니다.

이것은 귀(이근)로 소리(성경)을 들을 때 느낄 수 있는 좋고 싫은 마음의

분별(이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식의 대상은 오직 소리입니다.

소리를 유식의 용어로 하면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식 또한,  들어서 좋은 소리가 있고, 나쁜 소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부드러운 음악 소리가 있는가 하면,  철공소에서 쇠를 자를 때 나는 날카로운

소리도 있게 마련입니다.  또한 사람의 소리에도 두 가지가 있고,

그에 대한 반응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예를 들어 욕을 얻어먹었을 때

당장에 기분 나쁜 감정이 생기며, 칭찬을 들었을 때 기쁜 마음이 생기는 

것은 매우 본능적인 것이며, 직감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이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을 듣고서 지금 당장

표면에 드러난 감정으로는 기분이 나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를 

위해 필요한 욕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달게 받을 만한 소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이라도,  오직 이식으로만 인식한다면 '싫다'는

감정만이 생길 뿐입니다.  그러나 제육식으로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단순한 '욕설'이 아님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좀더 복잡한 마음의 작용은 이식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육의식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3)비식(鼻識)

셋째, 비근(鼻根)으로 향경(香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인 비식입니다.

즉,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생기는 '좋은 냄새', '나쁜 냄새' 하는 즉각적인 마음의

분별입니다. 당연히 비근의 대상은 냄새입니다. 향이라고 하나 향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우리가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4)설식(舌識)

넷째는, 설근(舌根)으로 미경(味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인 설식(舌識)입니다.

이것은 혀로 음식 등을 먹을 때 느끼는 맛있고, 맛없고 등의 마음 작용입니다.

여기에는 다만 맛이 있고 없는 것뿐 아니라 뜨겁고 찬것, 달고 짠맛, 싱겁고,

신맛 등 혀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합니다.

 

5) 신식(身識)

다섯째는,  신근(身根)으로 촉경(觸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의 작용인

신식(身識)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으로 물질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신근의 대상은 촉경이라고 하여 물질계를 말하는데, 물질계란 단순히 딱딱한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地),수(水),화(火),풍(風) 전체를 그 대상으로

합니다.  근본불교 교설의 오온에서 물질인 색을 설명할 때 지, 수, 화, 풍으로

설명한 것을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즉,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물질인 지(地)의 성질뿐만 아니라, 축축하거나

건조한 것 등 수(水)의 성질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신근의 대상이며, 무덥거나

춥고, 뜨겁거나 찬 것 등 화(火)의 성질, 그리고 호흡이나 불어오는 바람(風) 등도

우리의 몸인 신근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촉경의 범위는 

대단히 넓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상 다섯 가지의 인식 작용은 모두 선과 악,  좋고 나쁜

등의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에 대한 식별만이 가능합니다.  즉 빛과 소리, 냄새,

맛, 촉감 등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성(自性)만을 분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분별 작용을 자성분별(自性分別)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러한 분별은 현재

사물의 겉모습만을 헤아린다고 하여 현량(現量)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이외의 심오하고 깊은 마음의 분별 작용을 일으키는 제6의식은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다음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6)의식(意識)

유식에서 말하는 제6의식은 십팔계의 의식으로써,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모두를 포함한 일체 유형무형의 모든 대상, 즉 법경(法境)을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이 6의식은 앞에서 말한 5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선

전오식은 의지처가 눈, 귀, 코,혀, 몸 등 모두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6의식은 순수한 정신적인 기관이 그 의지처입니다.  대상 또한 객관적인

물질계 뿐만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인 모든 경계를 그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면 의식(意識)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마음작용을 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유식에서 바라보는 의식의 작용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전오식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성품만을 분별하는 자성분별을 한다고

하였는데,  이 6의식은 물론 자성분별(自性分別)도 하지만,  그 외에도

수념분별(隨念分別)과 계탁분별(計度分別) 등의 좀더 복잡한 분별작용을 합니다.

수념분별이란 과거를 회상한다거나,  미래를 생각하는 등의 분별 작용을 말하는

것이며, 계탁분별이란 착각을 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데 오류를 일으키는 분별

작용을 말합니다. 또한, 앞에서 전오식은 현재 나타난 사물에 대해 기본적인

사유를 일으켜 헤아리는 작용인 현량(現量)을 일으킨다고 하였는데, 

이 6의식은 여러 가지를 비교하고 분석하여 판단하는 작용인 '비량(比量)'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면 6의식은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6의식은 다른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구의식,  몽중의식, 독산의식,

정중의식, 광연의식 등이 그 이름들입니다.  이 이름들은 6의식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작용과 역할을 나누어 따로 이름 붙인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 하나 그 의미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오구의식입니다. 우선 오구의식(五俱意識)이란,  우리 주위의 모든

대상을 관찰할 때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과 함께 작용하여 그 대상을 분별하고 의식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안식과 함께 일어나는 의식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대상을 볼 때, 단순히 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온갖

분별심을 일으킵니다.  거리를 지나가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예쁜 아가씨를

보았다고 칩시다.  그저 보고 스치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잘 빠졌다든가(現量,

自性分別), 미니스커트가 너무 짧다(自性分別), 한번 데이트 해 보고 싶다,

내 여자친구보다 더 예쁘거나 혹은 못하다(比量),  저런 겉멋이 든 여자는 

집안일에는 신경도 안 쓸거야(非量,計度分別) 하는 등의 상상을 하게 되고,

심지어는 저런 여인과 결혼을 해서 미래에 아이도 낳고, 오손도손 살면 

얼마나 좋을까(隨念分別),  과거의 내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참 많이 닮았다

(隨念分別)든가 하는 등 온갖 분별심을 머리속에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복잡한 마음의 작용은 안근(眼根)단독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작용입니다. 이렇게 분별, 헤아림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제6의식의 분별

작용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귀로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나,  코로 어떤 냄새를 맡았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어떤 대상을 감촉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각종의 분별 작용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이렇듯 제6의식은 전오식과 함께 작용하여 각종의

분별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이 의식을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몽중의식(夢中意識)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꿈 가운데 천태만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꿈도

제6의식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전생, 또는 이전에 내가 지은 행위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제8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꿈을 꿀 때 제6의식을 통하여

다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통 때에는 식이 맑지 못하고,  복잡하고

번잡하여 아뢰야식이라는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다가,  꿈을 꾸게 되면 

복잡한 식이 가라앉고,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식들 중에 영향력이 강한

것들이 들쑥날쑥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몽중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꿈이라고 해서 모두가 진실인 것만은 아닙니다. 즉 본인의 현실이나

이전의 업과 다른 꿈을 꿀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전의 행위들이 

체계적으로 아뢰야식 속에 정리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전혀

다른 행위들이 서로 얽히게 되어, 하나의 불완전한 행위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의식에는 언젠가 남에게서나 

책에서라도 한 번쯤 경험했던 것들이 드러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꿈이란 것은 보통 대부분은 실답고, 순수하지 못한 작용이기에 공허한

의식 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세계가 건전하면 꿈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꿈이 없는 의식은 정신이 건강한 것이라 해석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지요.   텅 비어 있는 의식세계에 꿈은 없기

때문입니다.  놓는 공부,  비우는 공부,  방하착 공부를 하는 이유도,  복잡하고

번쇠한 의식을 텅 비게 하여 맑게 하기 위한 수행입니다.  망식(妄識)인

우리의 의식을 정화하는 수행인 것입니다.

다음은 독두의식(獨頭意識)입니다.

이것은 객관세계의 대상과 함께 작용하는 여타의 의식과는 다르게,  내면에서

단독으로 사유하고 생각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크게 본다면, 

몽중의식과 뒤에서 다룰 정중의식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의식으로 인해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회상하면서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고,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해 추측하고 계획을 세우곤 하는 것입니다.

이 독두의식으로 인해 우리들은 온갖 분별심을 내고, 본래 고요한 본심을

흐려 놓아 마음을 뒤흔드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무상하여 얽매여 집착한 바가 아님을 깨닫지 못하고 

애써 끄집어내어 스스로 그 속에 빠져 괴로워하고, 때로는 즐거워하는 등

스스로를 관념의 울타리에 가두고 있으며,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해서 미리부터 걱정을 하거나, 희망의 꿈을 꾸게 됨으로 인해 그 관념,

상상의 나래에 갇혀 스스로 괴로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네의 삶입니다.  이 모든 어리석은 의식을 이름하여 독두의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가 닦고 닦아 정화해야 할 마음 공부의 

주된 대상이 됩니다.  바로 이러한 스스로의 분별심을 맑게 정화하고

고요하게,  텅 비게 만드는 마음 수행을 통해 우리는 어느 정도의 맑은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수행을 통해 이를 수 있는 단계의 

의식이 바로 다음에 나올 정중의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정중의식(定中意識)이란 앞에서 말한 모든 의식에서 나타나는

모든 장애와 번뇌,  괴로움을 모두 정화함으로 인해 나타나게 되는 청정하고

맑은 의식인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삼매에 든다고 하거나,   마음을 

비운다고 할 때 나타나는 맑은 의식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행복과 안정을

가져다 주는 인식의 주체가 바로 이 정중의식입니다. 정중의식을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요즘과 같은 복잡 다단한 시대에 우리를 고요하고 평화롭게 하여

망상과 잡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이상에서처럼 제6의식은 물질, 정신세계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여 수많은 광범위한 인식 작용을 일으키므로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제6의식은 실로 우리의 삶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마음의

주된 작용입니다. 보통 '마음'이라고 하면 바로 이 6의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데 이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제6의식이 수많은 분별심을

일으키고, 각종의 광범한 의식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번뇌(煩惱) 때문입니다.  번뇌는 의식을 산란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유식에서는 번뇌를 6가지 근본번뇌(根本煩惱)와 20가지

수번뇌(隨煩惱)로 나누고 있습니다.  근본번뇌는 탐(貪, 탐냄),

진(瞋,성냄), 치(痴, 어리석음), 만(慢,교만심), 의(疑,의심), 악견(惡見,잘못된 견해),

의 여섯 가지이며,

20가지 수번뇌는 분(忿,분함, 약하게 성냄), 한(恨,원한), 부(覆,죄업을 숨김),

뇌(惱,분함, 한탄함), 질(嫉,시기,질투), 간(慳,아끼고 베풀지 않음), 광(誑,속이고

교만함),첨(諂,아첨), 해(害,남에게 손해를 끼침), 교(憍,교만하여 남을 멸시함),

무참(無慙,잘못을 저지르고 참회하지 않음), 무괴(無愧,포악한 일을 하고

반성하지 않음), 도거(棹擧,마음이 요동함), 혼침(昏沈,혼미하고 침체함),

불신(不信, 진리를 못믿음), 해태(懈怠,게으름), 방일(放逸,방종하고 방탕함),

실념(失念,진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산란함), 산란(散亂,정신이 밖으로 내달려

악견을 유발함), 부정지(不正知, 대상을 항상 오해하는 어리석음)가 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번뇌 때문에 제6의식이 산란하게 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번뇌들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제6의식 스스로 산란되게 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본뇌를 야기하는 것은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입니다.  또한 모든 식의 근본식, 근본불교와

부파불교의 논사(論師)들의 커다란 의문의 대상이었던 업의 저장 창고

역할을 하는 식으로서의 제8야뢰야식(第八阿賴耶識)이 있습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유식 사상은 우리의 마음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뜻 보기에는 공 사상과 전면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존재의 양면을 나타내고 있을 뿐 그 내용은 똑같은 진리의 양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3)육식의 실체, 공(空)

 

그러면 이제부터 이 여섯 가지 의식,  즉 6식이 공(空)인 연유에 대해서

살펴보는 일이 남았습니다.  앞에서 꾸준히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주관적인

감각기능은 반드시 객관적인 대상이 있어야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귀는 있지만 소리가 없다거나,  코는 있는데 대상인 냄새가 없어도 안되며,

반대로 객관계의 대상은 있지만 우리 주관계의 기관이 없다면 인식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즉 맹인이라면, 눈은 있지만 정확히 말해 안근(眼根)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안근이라는 것은 그 기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까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맹인에게는 안근이 없기에, 색경이 있더라도 안식의

작용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귀머거리나 벙어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육근과 육경은 항상 함께 작용하는 것이며,  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해야함 육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앞에서 육근과 육경은 항상하지 않아(무상), 고정된 실체가 없고(무아),

연기하는 존재로서 무자성이며, 공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아가 이 두 가지 육근과 육경이 합쳐졌을 때 일어나는 인식 작용인 육식도

공하다는 것을 살펴보면, 십팔계 또한 공임이 밝혀질 것은 물론입니다.

왜 육식은 공(空)한 것일까?

육근과 육경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온갖 마음 작용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

육식은 육근이라는 인간의 기관에 숨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육경이라는 대상 속에 숨어 있는 것일까?

육식은 육근에도,  육경에도 숨어 있는 작용이 아닙니다.  다만 '접촉', '결합',

'연관', '인연'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육근에도 없고,  육경에도

없는 것이 어떻게 연관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한다면,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는가?

절대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은 있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와 나무를 서로 연관지어 접촉을 가하면 그 

인연 관계 속에서 불이 일어납니다.  나무와 나무를 서로 비벼주면 불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불은 있지 않으며,  다면 연관

인연 속에서 불이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식도 이와 같습니다. 육근에도,  그렇다고 육경에도 육식은 없지만 서로

'연관'되고 '접촉' 됨으로 인해 육식이 연하여 일어나는(緣起)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가지고 딱히 '육식이다'라고 고정되게 말할 수 없는 것(무아) 

입니다. 또한 나무를 비벼 불을 냈지만,  그 불도 인연이 다하면 꺼지게 마련이듯

육식 또한 인연이 바뀌게 되면 사라지는 것(무상)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어떤 고정된 자아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든다면, 눈(안근)으로 보기 싫은 흉측한 시체의 모습(색경)을 보았을 때,

안식(眼識)이 작용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되며, 의식(意識)이 작용하여

저 시체는 왜 저렇게 버려져 있을까, 예전에 내가 보았던 어떤 것들보다도

더 흉하다,  인간의 모습이 저런 것인가 하는 등의 온갖 분별심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이내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 다시금 좋은

친구를 만나고,  소풍을 가서 좋은 경치를 구경한다면,  조금 전에 있었던

의식 작용은 바뀌게 됩니다.   그래도 생각이 날 수가 있다고 하겠지만,

시간을 조금 늘려 놓아 1년,  10년쯤 세월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의 마음은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의 의식도 항상하여 고정된 것이 아니며,  주위의 상황,

경계에 의해, 즉 인과 연에 의해 항상 바뀌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식에도 

스스로의 자성이 없기에 무아, 무자성이며, 항상하지 않기에 무상이고,

인과 연에 의해서 생멸을 반복하므로 연기이며, 이러한 사실을 통틀어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결론짓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