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마음 공부(법상스님)

반야심경과 마음 공부 - 41

혜월(慧月) 2021. 4. 18. 10:28

 

반야심경과 마음 공부 - 법상스님

 

파사분

 

6장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1. 무지역무득

 

위에서 <반야심경>은 일체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존재를 모두

부정하고 있으며, 이어서 그 현상계를 조견(照見)했을 때 나타나는

진리인 사성제와 십이연기까지도 차례로 부정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부정의 논리를 통해서 공의 세계를 드러내는 이유는 지혜,

즉 반야바라밀을 체득하기 위함이며,  그 지혜에 의지해서 모든 보살은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나 열반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우리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더 이상 

부정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기는 '근본'에 대한 부분까지 모두를 부정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는 더 이상 부정해서는 안 될 지혜, 즉

반야바라밀과 그 지혜를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  열반까지 모두를

부정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반야심경>이 부정의 

논리를 통해 공의 세계를 드러내는 마지막 부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혜(慧)란 우리가 현상계의 조견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의 안목이며,

얻을 것(得)이란 그 바른 지혜에 의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의 세계,

즉 해탈이며 열반입니다.  즉 이와 같은 두 가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며,  최후의 목표인데도 불구하고 이 모두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지혜를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의 피안으로 가기 위해 고해(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배의 

이름이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길이 지혜라고 하니, 모두가

이 지혜에 집착을 해 버립니다.  지혜를 증득하는 것에만 얽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이 지혜조차도 부정해 버립니다.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배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지혜라고 했을 때

분명 지혜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다가 이것이 꿈인 것을 올바로 알아(지혜) 꿈을 깼다고 했을 때,

꿈을 깨고 나면 꿈을 깨는 최상의 열쇠인 지혜마저도 없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니 우리가 바라 볼 것은 오직 깨달음,  열반의 기쁨뿐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득(無得)이라고 하여 반야심경에서는

궁극의 깨달음마저도 부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와 궁극의

깨달음까지도 모두 부정하고 있다는 것은 이 모두가 공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공 사상은 현상계의 본질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상세계 즉 해탈, 열반의 본질이기도 한 것입니다. 

일체가 공이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그 속에 지혜는 있다던가 해탈은

있다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체가 공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반야심경은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혜나 열반에도 집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가 있을 때 열반이 있고, 무명이 있을 때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지 또한 우리들의 분별로 만들어 낸 말일 뿐이고, 

개념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열반엔 열반이란 말이 필요없고, 모양을 지울

수도 없으며, 그렇듯 열반이 일체가 딱 끊어진 언어를 초월하고,

분별을 초월한 자리라면,  그러한 열반에 이르는 지혜라는 것 또한 하나의

말이고 개념일 뿐이지 이렇게 애써 언어로써 표현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즈음이 되면,  그야말로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일체가 다 끊어진 고요와

침묵의 절대공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더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개념지을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지금까지의 긴 설명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무한 침묵의 절대 공의 세계가 펼쳐짐 없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