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스크랩] 세 가지 연기법을 공부할수록 부처님께서 `무아`라고 내가 없다라는 것을 무엇때문에 말씀하셨는지를 알수가 있습니다. - 소남 스님

혜월(慧月) 2016. 10. 21. 21:34








용수보살의 『중론』 의 팔불중도(八不中道)라고 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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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것에 의지하여 나타나기에 멸함도 없고 생겨남도 없다.

끊어짐도 없고 영원함도 없다.

옴도 없고 감도 없다.

다른 뜻도 아니고 같은 뜻도 아니다."


이런 개념들을 희론이라고 합니다.


희론이라고 할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희론도 여러 가지로 나눌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불(八不)라고 할때

8가지가 아예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다' 라고 할때,

생기고 멸하는 것이 없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기면서 소멸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기는 것이 절대적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생기는 것과 없어지는 것은 있는데

절대적인 연기법안에 의지하지 않고 생기고 소멸되는 그런 것이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구분해야 합니다.


있다고 하는 것은 속제입니다.

없다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상을 볼때 많이 착각합니다. 제대로 못봅니다.

우리 마음에 근본문제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집착하고 번뇌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집착하고 번뇌를 일으키게 하는 근본무명, 무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뿌리같은 무명, 무지는 무엇입니까?

쉽게 설명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논리를 배우기 시작해서 천천히 배워나가면 공성, 연기를 상견,단견 양극단

빠지지 않고 부처님말씀 그대로를 이해할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없다라고 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연기법으로 윤회하고 해탈하고 인과의 법칙등이 성립하는 것을

이해하기는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연기법을 깊게 이해하게 되면 없다라는 무자성, 무아는 금방 이해합니다.

처음부터 무아, 무자성을 잡을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알기 위해 논리를 통해서 연기를 잘 봐야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연기(緣起) 한문으로 인연 연에 일어날 기,

범어로 쁘라띠뜨야 삼우뜨빠다(pratītya-samutpāda)라고 합니다.

연기법은 세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첫번째, 연기법은 원인과 결과의 인과의 연기법입니다.

인과는 절대로 거짓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생에 엄청나게 복을 쌓아서 사람몸을 받았습니다.

불교국가에 태어났습니다.

부처님법을 만났습니다.

여러생에 복을 쌓은 공덕을 지어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다음생에 어디갈지는 점집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선한 마음을 많이 일으키고 선업을 많이 쌓고 있다면

다음생에 분명히 좋은 곳에 태어납니다.


두번째, 상대적인 개념의 연기법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 따라서 존재하는 연기법입니다.

예를 들면 길은 하나인데 아래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르막길입니다.

위에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리막길입니다.

그러면 이길은 내리막길입니까? 오리막길입니까?


이 음식이 맛있어요? 맛없어요? 할때 먹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입니다.

음식자체내에서 맛있다, 맛없다 구분할수 없습니다.

만약에 있다면 어떤 사람이 먹어도 맛있다고 해야 합니다.

'나'가 있으면 '너'가 있습니다.

첫번째 보다 조금 더 미세해지는 것입니다.


세번째, 이름만으로 존재하는 연기법입니다.

존재하는 궁극적인 방식에 대해 원인과 결과를 의지하지만

자체내에서 없고 다 이름만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대통령은 취임식하기 전에 대통령이 아닙니다.

그러면 같은 사람인데 대통령 되기전과 후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가 투표해서 대통령이라고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자체내에서 대통령이라고 할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에 자체내에서 있다면 태어날때부터 대통령이어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 '나' 라고 하는 것은 나의 육체, 정신을 잘 살펴봐도

나의 육체, 정신내에서 '나'라고 할수 있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존재할까요?

'나'라고 이름짓고 '나'라고 생각해서

'나'라고 연기적으로 존재합니다.


그것을 가립(假立), 가짜로 성립한다, 가명, 가유(假有)라고도 합니다.

가짜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짜로 따져보면 실체를 찾을수 없습니다.


대상은 객체입니다.

객체내에서 존재할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다 주체내에서 이름과 생각에 의지해서 '사람입니다', '동물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의도 있어야 되지만 그 존재하는 궁극의 방식면에서 아주 미세한 연기법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가지 연기법은

인과적인 연기법,

상대적인 연기법,

자체내에서 없고

이름과 생각으로 지어내서 있는 미세한 연기법입니다.


이 세가지를 통해서 연기법을 공부하면 할수록

깊게 생각하면 부처님께서 '무아'라고 내가 없다라는 것을

무엇때문에 말씀하셨는지를 알수가 있습니다.


전혀 '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안,의,비,설,신,의 오근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눈도 없고 코도 없고 그대로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있기는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없습니다.

세 가지 연기법으로 존재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독립적으로

자체내에서  실체가 있다라는 그 생각이 틀리다고 하는 것입니다.

틀리다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부처님께서 무아, 무자성, 공성, 진리라고 여러 가지면에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분석하는 것입니다.


- 게시 소남 스님의 논리(딱셀) 공부 중에서


"어떠한 행을 하더라도 그 뒤에는 욕이 따릅니다.
그림을 보고 생각하세요.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의 바라는 바를 만족하게 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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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티벳센터
글쓴이 : ta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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