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

[스크랩] 14. 타력본원에 승탁하느냐의 여부

혜월(慧月) 2017. 3. 3. 21:04

  14. 타력본원에 승탁하느냐의 여부


  타력본원을 타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고,

  타지 못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본원을 타지 못하는 두 가지 모습이란,

  첫째, 죄를 지을 때 타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죄를 지으면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왕생이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본원을) 타지 못한 것이다.

  둘째, 도심을 발할 때 타지 못한다.

  그 이유는 비록 똑같은 염불이지만 이 도심이 있는 까닭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고,

  만약에 도심이 없다면 설사 염불을 하더라도 왕생할 수 없을 것이다. 도심이 먼저고 본원은 그 다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각한다면 타지 못한 것이다.

   다음, 본원을 타는 두 가지 모습이란;

   첫째, 죄를 지을 때 탐이라.

  그 이유는 이처럼 죄를 지으면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본원명호를 칭념하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본원을) 타는 것이다.

  둘째, 도심이 일어날 때 탐이라.

  그 이유는 이 도심으로 왕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도심을 시작 없는 옛적부터 비록 일으킨 적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생사를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도심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지은 죄업의 경중을 말하지 않으며,

  오직 본원명호를 부르는 염념상속의 힘에 의지하여 왕생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타력본원을 타는 것이다.

  乘他力本願有二,

  不乘亦有二。

  先,不乘本願之二相者:

  一者,造罪時不乘。

  其故者: 造如是罪,則雖念佛,往生不定。

  如此想時,則不乘也。

  二者,發道心時不乘。

  其故者:雖同念佛,有此道心,故得往生;

  若無道心,則雖念佛,不得往生。

  以道心爲先,本願爲次,

  如此想時,則不乘也。

  次,乘本願之二相者:

  一者,造罪時之乘。

  其故者:如是造罪,必墮地獄;

  然稱念本願名號故,決定往生。

  如此想時,則是乘也。

  二者,起道心時之乘。

  其故者:不以此道心生,

  此等道心,無始以來雖發,至今未離生死。

  故不論道心之有無,不言造罪之輕重,

  唯依本願名號,念念相續之力,得遂往生。

  如此想時,則是乘他力本願也。


  이 조목에서도 많은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 모두 ‘부처님의 본원을 탄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부처님의 본원을 탈 수 있을까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부처님의 본원을 타지 못한다’고 말할까요? 역시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이로써 유추해보면 다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비하신 상인께서 우리를 위해 다 말씀해주셨습니다.


  ‘먼저, 본원을 타지 못하는 두 가지 모습이란’: 먼저 이것부터 당신에게 알려줌으로써 ‘본원을 타지 못하는 것’을 피하도록 해줍니다. 무엇을 ‘본원을 타지 못한다’고 말할까요?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류를 범합니다. 만일 뒤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당신은 아마 “아,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생각했어”라고 말할 겁니다. 이렇게 생각했다면 본원을 타지 않은 것입니다.


  ‘첫째, 죄를 지을 때 타지 못한다’: 그가 죄업을 지었기에 본원을 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죄를 지으면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왕생이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러한 죄까지 지었는데, 내가 비록 염불하더라도 틀림없이 왕생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다수의 사람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본래 ‘만 명이 닦아서 만 명이 왕생하는 법’이 도리어 왕생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본원을 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본원을) 타지 못한 것이다’: 그럼 본원선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당신을 민 게 아니라 당신 스스로 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 다 중생들 스스로 범한 오류입니다.


  ‘둘째, 도심을 발할 때 타지 못한다’: ‘내가 용맹정진하여 도심을 발하고……’ 도심을 발할 때 부처님의 본원을 타는 게 아닐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도심을 발할 때도 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부처님의 본원을 타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비록 똑같은 염불이지만 이 도심이 있는 까닭에 왕생할 수 있는 것’: ‘비록 똑같은 염불이어서 당신도 염불하고 나도 염불하고 과거에도 염불하고 현재에도 염불하지만, 지금은 나의 이런 강한 도심 때문에 내가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도심이 없다면 설사 염불을 하더라도 왕생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이처럼 강한 도심이 없었다면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대충대충한다면 왕생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도심이 견고하고 용맹정진하지 않으면 역시 왕생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심이 먼저고 본원은 그 다음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본인 범부의 도심을 첫 번째 위치에 두고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두 번째 위치에 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무엇을 탈까요? 본인의 도심을 탄 것이지 본원을 탄 게 아니지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타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염불이 으뜸입니다! 왕왕 우리는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염불하자, 염불하자. 그러나 나에게 번뇌망상이 있으면 왕생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번뇌망상을 으뜸의 위치에 두고 육자명호를 그 다음 위치에 두는 것으로서 육자명호가 번뇌망상의 장애를 타파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원을 타지 않은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어제 열네 번째 조목을 반만 공부하였습니다. 바로 타력본원을 타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고 타지 않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본원을 타지 않는 두 가지 경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타력본원을 타는지 여부는 오로지 염불하는 사람을 상대로 말한 것이지 제행을 닦는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제행을 닦는 사람은 줄곧 아미타부처님의 타력본원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염불하는 사람이더라도 타력본원을 타는 사람이 있고 타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어디에서 나타날까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하나는 죄를 지을 때이고 또 하나는 도심을 발할 때입니다. 죄를 지을 때 ‘내가 비록 염불을 하고 있지만 이러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왕생할 수 없을 거야’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비록 염불을 하고 있지만 그는 이미 물러난 것이고 타력본원을 타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도심을 발할 때 본원을 타지 않는 걸까요? ‘비록 염불을 하고 있지만 내가 도심을 발했기 때문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도심이 없다면 염불을 해도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경우에, 첫 번째 경우는 죄를 무겁게 여기고 본원과 염불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며, 두 번째 경우는 도심을 우선으로 하고 본원을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범부는 범부의 죄업과 두려움으로 인해 아미타부처님의 명호의 원력을 경시하여 우리의 도심을 으뜸으로 삼고 아미타부처님의 본원구제를 두 번째로 두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우러러 의지하는 게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가 배를 타려면 우리의 무게중심이 배위에 있어야만 배를 탈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한쪽 발은 배를 딛고 있지만 다른 한쪽 발은 여전히 언덕위에 있어서 무게중심이 뒷발에 있다면 그럼 당신은 배를 탄 게 아닙니다. 


  비록 염불을 하고 있어서 마치 발이 아미타부처님의 대원선에 닿은 것 같지만 그의 무게중심이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자신의 도심을 생각하면서 “나에게 도심이 있어야만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중심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도심에 있습니다. ‘나에게 죄가 없어야만 왕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지요. 그는 중심을 아미타부처님의 타력본원에다 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배를 타는 것은 우리의 모든 무게를 전부 이 배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죄업이든 번뇌든 공덕이든 이 모든 것을 전부 다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나무아미타불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 없이 오직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만 부를 뿐입니다.


  그래서 선도화상께서 “의심과 걱정 없이 저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래에 ‘본원을 타는 두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를 지을 때 탐이라’: 죄를 지을 때 어떻게 본원을 탈 수 있을까요? 사실 본원을 타고 못 타고는 우리가 죄를 짓고 우리가 도심을 발하고 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죄를 지을 때 그가 다른 생각이 떠오른 것으로, 이것을 ‘탐’ 혹은 ‘타지 않음’이라 부르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을 때 어째서 본원을 탄다고 말할까요?


  ‘그 이유는 “이처럼 죄를 지으면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 불교의 인과관입니다. 마치 우리같이 신구의 삼업으로 부정한 죄업을 짓는 범부는 필연적으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본원명호를 칭념하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본원을) 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관경』 하품왕생의 상황입니다. 하품하생·하품중생·하품상생은 십악죄·파계죄·오역죄를 지은 자들로서 경에서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 끝없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지은 죄업에 근거하여 선도화상께서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져서 무량겁 동안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사람도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부른다면 왕생이 결정된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고 하셨지요. 이것이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본원구제의 불가사의함입니다. 따라서 『관경』의 하품왕생이야말로 가장 멋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와 같아서 그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가장 중대한 고비에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 즉각 정토로 왕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아미타부처님의 구제의 대자대비를 가장 집중적으로 잘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와 같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은 범부의 인과로부터 말한 것으로서 인과관은 우리불교의 기본입장입니다. 만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사람에겐 해탈의 희망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럼 아미타부처님께서 발한 서원도 세간을 초월하는 대비원력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원명호를 부르는 자는 반드시 왕생한다’: 이렇게 왕생의 여부는 모두 명호를 전기轉機로 삼습니다. 만일 염불을 하지 않으면 곧장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이렇게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자신의 죄업을 아미타부처님의 명호에 완전히 맡기고 아미타부처님의 구제에 수순함으로써 안심이 되고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지옥의 불길이 우리 발밑까지 타오를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불길이 타오르게 됩니다.


  ‘둘째, 도심이 일어날 때 탐이라’: 앞에서는 ‘도심을 발할 때 타지 않음’이었는데, 여기서는 어떻게 ‘도심을 발할 때 탐’일까요?


  ‘그 이유는 “이 도심으로 왕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도심을 시작 없는 옛적부터 비록 일으킨 적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생사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다수사람들은 모두 도심을 왕생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원에 승탁한 사람은 아미타부처님의 타력서원을 우러러 의지하며 마음속으로 자신의 도심에 의지하여 왕생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도심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도심이란 곧 무상보리심이요, 대자대비심입니다. 좀 더 간략히 말하면 맹세코 생사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용맹정진하여 수행하는 등등으로, 이른바 구도심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을 왕생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시작이 없고 끝이 없다고 한다면, 도작대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비록 중생들에게 모두 불성이 있어서 “광겁 이래 마땅히 수많은 부처님을 만났을 텐데 어찌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생사윤회를 하며 화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불생불멸하는 불성이 있다면 우리는 광겁 이래에 틀림없이 수많은 부처님을 만났을 것이고, 부처님을 만나서 부처님의 교법도 듣고 도심도 발했을 것인데,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도대사님의 『관경소』 ‘상품상생석’ 가운데 육념六念 수행을 해석하는 대목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즉 ‘자신은 시작 없는 옛적부터 이런 대보살들과 동시에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며 맹세코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겠다고 발원하였으나, 이런 대보살들은 모두 다 수행성취를 하셨다. 이렇게 성도·득도하신 분들은 그야말로 쇠털같이 밤하늘의 별같이 갠지스강의 모래 수 같이 많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생사범부로서 업장은 산더미 같고 복과 지혜는 미미하다. 여기까지 생각만 하면 깜짝 놀라고 슬피 탄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과거 겁 이래에 비록 도심을 발했었고, 비록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미륵보살·지장보살 등과 함께 동창이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분들은 도심을 발하고 지금 이미 대보살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기서 육도윤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직 생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도심이 우리를 구제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근기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근기라면 우리 모두 벌써 도를 이루고 해탈을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도심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지은 죄업의 경중을 말하지 않으며, 오직 본원명호를 부르는 염념상속의 힘에 의지하여 마침내 왕생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가 타력본원을 타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속에 도심의 유무를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로서는 있어도 없는 것과 같고, 없으면 당연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무엇을 ‘있어도 없는 것’이라고 말할까요? 있어도 간혹 한 번씩 발하는 것뿐입니다. 범부의 마음은 ‘설사 청정한 마음을 발하더라도 물을 긋는 것과 같아서’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힘을 갖추지 못하고 우리로 하여금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있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도심의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를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이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병에 걸려서 곧 죽을 것 같은데 당신이 많은 돈을 들여 약을 잔뜩 사왔지만 당신의 병을 고칠 수 없다면 이 약은 있든 없든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당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한 가지 약만 가지고 있다면, 비록 한 알밖에 없어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불법을 배우고 있지만 우리는 죄를 짓고 업을 짓는 범부들입니다. 갖가지 법문들은 알약과 같아서 당신이 그 약을 가져오더라도 당신의 근기에 맞지 않아 당신으로 하여금 생사해탈 하도록 할 수 없으면 있어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오직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아가타약만 주웠기 때문에 따지려면 이 일만 따져야 합니다. 따라서 ‘도심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지은 죄의 경중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광대사께서도 비유를 드시면서 모래알이 비록 가볍긴 하나 곧바로 물밑으로 가라앉고, 큰 돌이 비록 무거우나 배에 실으면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모래알이 비록 가볍지만 물속에 놓으면 바로 가라앉습니다. 결코 가벼운 모래알이라고 해서 수면위로 떠다닐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돌이 매우 무겁기는 하나, 돌이 무겁다고 해서 반드시 물밑으로 가라앉는 것도 아닙니다. 돌을 배위에 놓기만 하면 피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업의 경중은 해탈의 원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물며 죄업이 산더미같이 많은 우리들이겠습니까?


  우리 같은 범부들이 해탈할 수 있느냐 여부는 오로지 타력본원을 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본원이 바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고 이 명호를 끊임없이 칭념하는 것이지요.


  끊임없는 칭념(상속칭념)에 관해서도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법연상인께 여쭙습니다. “무엇을 끊임없는 염불(相續念佛)이라고 부릅니까?” 이에 법연상인께서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첫째, 선도화상의 해석에 의하면 하루에 만 번씩 칭명하는 것을 상속염불이라고 부른다. 다만, 상인께서 다시 설명을 하셨지요. 여기서 만 번이란 당신더러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단숨에 만 번의 염불을 마치고 마작을 하러 간다거나 놀러 다니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상속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만 번의 염불은 새벽부터 밤까지 만 하루에 걸쳐 하는 것으로서 당신이 천천히 염불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 번을 부르는 것을 상속염불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당신이 두 시간 만에 다 부른다거나 심지어 이 숫자를 서둘러 채우려고 한 시간 반 만에 끝내버리고 온종일 빈둥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면, 이것은 상속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많은 연우님들이 늘 말합니다. “스님, 저에겐 염불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염불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한 번 염불했다하면 한 두 시간 염불을 할 수 있어야만 ‘시간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집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로 할 일들이 많은데 이런 시간은 당연히 드물 것입니다. 만일 이런 시간이 없다면 30분이든 15분이든 5분이든 시간이 날 때마다 서둘러 염불해야 합니다. 이렇게 염불한다면 시간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의미 없는 일에다 낭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충분한 시간이 있습니다. 자녀의 문제도 해결되었고 정년퇴직도 했고 퇴직금도 충분하여 의식주를 위해 걱정할 필요가 없기에 온종일 염불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일도 해야 하고 출근도 해야 하고 가정도 돌봐야 하고 자녀도 돌봐야하며 또 어린 손자도 안아줘야 하고 또 집안일도 해야 한다면, 이런 사람은 시간을 짜내서 염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투리 시간들을 이용하여 염불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염념상속입니다. 바쁠 때는 바쁘게 지내고 쉬는 시간이 되면 염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에서 소임을 보든 집에서 가사를 하던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밖에서 차를 탈 때도 염불하고 집에 돌아와서 틈만 나면 염불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염불하여 하루 종일 이어지는 것이 상속염불입니다.


  그래서 법연상인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숫자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선도화상의 해석에 따라 하루에 만 번씩 염불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선도화상께서는 『관념법문』에서 이렇게 해석하셨는데 최소한 만 번씩 염불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기준은, 법연상인께서 말씀하시기를 밥 한 끼 먹는 사이에 세 번 염불할 수 있으면, 이것을 상속염불이라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밥 한 끼 먹으려면 대략 2,30분 정도 걸리고, 조금 빨리 먹더라도 15분 정도는 걸립니다. 5분마다 한 번씩 염불하는 것은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평균적으로 계산을 해보면 하루 종일 염불을 많이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상속염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마음속으로 항상 이 일(염불)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이 두 번째 기준입니다.


  세 번째 기준은, 중생들의 근기가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숫자를 못 박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왕생심이 간절하다면 저절로 상속이 될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정말로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그의 마음은 저절로 상속하게 됩니다. 일을 하다가도 쉬는 시간만 되면 염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 상속염불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염념상속의 힘’이란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염념상속의 힘’을 우리자신의 수행의 힘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염불법문이 아주 간단하지만 기타법문은 상대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수준에 도달할 필요 없이 당신은 한 구절 한 구절씩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단지 이런 힘만 들이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적은 힘만 들여도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염불에 커다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자명호자체가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대원업력이므로 ‘염념상속의 힘’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마침내 왕생을 달성한다’: 왕생의 소원을 달성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가 타력본원을 타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사실 모든 상황을 포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쁜 것, 타락하는 것,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본원을 탈 수 있을까요? 앞에서 본원을 타지 않는 것은 우리가 다시 복습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뒤에 본원을 타는 두 가지 상황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죄를 짓고 악을 짓고 번뇌망상을 일으키는 상황을 만나면, 비록 번뇌망상이 이처럼 많고 무거워서 성도문으로는 반드시 타락할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명호를 부르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되돌아와서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타야 합니다.


  도심을 일으키고 착한 마음을 발하고 자비심을 발하는 등등으로 교만하여 “나는 도심을 발하였고 나는 자비심이 있기 때문에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 모두 타력본원을 타는 게 아니라 당신본인의 도심을 타고 당신의 자비심을 타고 당신의 지혜를 타는 것으로, 이것이 있어야만 왕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내가 무시 겁 이래에 이러한 도심을 발했던 적이 있고 이러한 자비심도 일으킨 적이 있으며 이러한 수행도 해본 적이 있지만 나를 구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명호입니다. 따라서 되돌아와서 한결같이 염불해야 합니다. 


  악을 짓든 아니면 선을 닦든 간에 모두 우리로 하여금 염불로 회귀하도록 하는 계기가 있습니다. 악을 지을 때도 되돌아와서 염불할 수 있어야지 거기서 “아이구! 내가 이런 죄를 지었으니 어떡하면 좋을까? 틀림없이 타락할 거야!”라며 눈물을 흘리고 슬피 탄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둠에 어둠을 더하여 타락하게 됩니다. 마땅히 바로 되돌아와서 염불을 해야 합니다. 선을 닦을 때도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왕생할 수 있다”며 우쭐거리며 뽐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양변에 떨어져서 아미타부처님의 본원과 상응하지 못합니다.


  만일 정확히 사유할 수 있으면 바로 일향전념을 할 것이고, 선이든 악이든 모두 일향전칭의 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순정시대 純淨時代
글쓴이 : 淨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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