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스크랩] 《수행과 수행이 아닌 것의 경계가 무엇입니까?》 - 람림

혜월(慧月) 2016. 7. 23. 22:06

 

 

 

 

 

 

 

 

 

이번 생에 먹고 입는 것들에 많은 집착을 보이는 것은,

이 삶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것을 모르면

모르는 만큼 아무리 수행을 해도 오직 이번 생을 위해서만 하게 된다.

'쫑카파' 대사께서,

"누구나 언젠가는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오늘은 죽지 않을 거라는 어리석은 마음을

죽기 직전까지 갖는다."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 또한 오늘은 죽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수행하는 것을

내일로 자꾸 미루면서 게으름만 피우고 있다.

지금 수행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다지 완벽하게 되지 않는 것은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렇게 되면 듣고 생각하고 닦는 것들이

오히려 명예나 자기 잘난 체하는 것에 빠지는 함정이 되며,

참선하거나 염불하는 것도 이번 생에 액땜하기 위해 하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비록 사람도 만나지 않고 먹을 것을 줄이면서 산꼭대기의 토굴에서 수행하더라도

마음속에 명예와 잡된 것들이 뒤섞여 있다면 무슨 수행의 의미가 있겠는가?

어떤 제자가 스승 '아띠샤'께,

"오직 이번 생만 생각하면 그 과보는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그 과보는 그대로이다." 라며 "이번 생만 수행했으니,

모든 것이 오직 이번 생에만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고 말씀하셨다.

"다음 생에는 어떤 과보가 있습니까?" 하고 제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다음 생에는 지옥.아귀.축생 등에 떨어진다." 하고 대답하셨다.

이와 같이 이번 생을 생가하면 그 과보로 이번 생의 작은 일들은

성취될지 모르나, 다음 생에는 삼악도에 반드시 떨어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번 생만 생각하고 수행하는 사람은 수행하지 않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다.

진정 수행을 하려면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버려야 한다' 라는 것은 거지처럼 가난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수행이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일을 성취하는데 사용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수행과 세속적인 일은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스승 '뽀또와' 께서는

"바늘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으면 바느질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다.

이를 버릴 수 없으면 세속의 팔풍(八風)에만 빠지게 된다."

고 하셨다.

은혜로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륜성왕으로 60.000번 태어날 수 있는 복을

우리 수행자들에게 회향하셨으므로, 이 사비세계가 흉년으로 대기근이 오더라도

수행자가 굶어 죽는 일은 없다.

'수행자가 산에서 스스로 굴러 내려오지 않으면,

먹을 것이 저절로 산으로 굴러 올려진다.'

라는 이야기도 여기서 비롯된다.

'뽀또와' 가 스승 '돔뙨빠' 에게,

"수행과 수행이 아닌 것의 경계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번뇌의 치료제가 되면 그것이 수행이고, 치료제 역활을 하지 못하면

수행이 아니다. 세속적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수행이고,

더 빠져들게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라고 답하셨다.

이러한 것들이 수행과 세속적인 일이 반대편에 서 있다고 하는 이유이다.

누구든지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완전한 수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과 무상을 관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생에 대한 집착도 버리지 못하면서 멀리 부처의 경지나 밀교적인 높은 경지만 찾는다면,

이는 바로 눈 앞에 놓여 있는 불구덩이는 살피지 않고 멀리 있는 산을

향해 가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 람림 中 / 티벳 스승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묻는다면

출처 : 한국티벳센터
글쓴이 : ta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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