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그래서 나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만한 상대도 없이
홀로 지내왔는데, 육 년 전 어느 날 사하라 사막에서
문득 비행기 고장을 만나게 되었다.
비행기 엔진의 어딘가가 파손된 것이다.
정비사도 승객도 없이 혼자였으므로 나는
그 어려운 수리를 손수 해보겠다고 마음억었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죽는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마실 물이 일주일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첫날 밤,
나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수만 리 떨어진 사막에서 잠이 들었다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뗏목을 타고
표류하는 난파자보다도 훨씬 더 고립된 신세였다.
그러니 해가 뜰 무렵,
어떤 기이한 목소리에 잠이 깬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말했다.
"저기......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응?"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나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후닥닥 일어났다.
눈을 비비고 주위를 잘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아주 이상하게 생긴 조그만 아이가
나를 심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 있는 그림은 훗날 내가 그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 중에서 가장
잘된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그림은 모델보다는 훨씬
덜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그건 내 탓이 아니다.
여섯 살 적에 이미 어른들 때문에 화가의 꿈을 접어버린 후
나는 뱃속이 보이지 않거나 보이거나 하는 보아구렁이 외에는
그림 그리는 것을 배워본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난데없이 나타난 그 아이를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보았다.
여러분은 내가 지금 사람 사는 지역에서 수만 리
떨어진 곳에 홀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런데 이 아이는 길을 잃은 것 같지도 않았고,
배고파서,
목말라서,
무서워서 죽겠다는 표정도 아니었다.
사람 사는 곳에서 수만 리 떨어진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아이 같은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이윽고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니? "
그러자 그는 아주 중대한 일이기나 한 것처럼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부탁이야.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너무나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게 되면 감히 거역할 생각을
못하는 법이다.
사람이 사는 지역에서 수만 리 떨어진 곳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처지에 너무나도 엉뚱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나는 결굴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과 만년필을 꺼냈다.
그러나 곧 내가 배운 것은 지리, 역사, 산수, 문법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 기분이 나빠진 목소리로)
난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괜찮아.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양은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내가 그릴 줄
아는 단 두 가지 그림 중의 하나를 그려주었다.
뱃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구렁이의 그림 말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냐, 아냐 ! 보아구렁이 뱃속의 코끼리는 싫어.
보아구렁이는 너무 위험해. 그리고 코끼리는 너무 거추장스러워.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은 곳이거든.
난 양을 갖고 싶어. 나, 양 한마리만 그려줘."
그래서 나는 양을 그렸다.
그는 양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안돼! 이 양은 벌써 병이 들어버렸는걸.
다른 걸로 하나 그려줘."
나는 다시 그렸다.
내 친구는 너그럽고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 참.... 그건 양이 아니라 숫양이잖아. 뿔이 달렸으니까....."
그래서 나는 또 다시 그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앞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퇴짜를 맞았다.
"이건 너무 늙었어. 난 오래 살 수 있는 양이 갖고 싶어."
엔진을 분해하는 일이 급하기에 나는 아무렇게나
다음과 같은 그림을 끼적거려놓고는 그에게 한마디 툭 던져보았다.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속에 있어."
그러자 어린 심판관의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고 나는 몹시 놀랐다.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거야!
이 양한테 풀을 많이 줘야 할까?"
"왜 그런 걸 묻지?"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거든."
"풀은 넉넉할 거야. 내가 그려준 건 아주 작은 양이니까."
그는 고개를 숙이고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그다지 작지도 않은데 뭐......이런! 잠이 들었네."
이렇게 해서 나는 이 어린 완자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