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간화선 수행에 대해서

혜월(慧月) 2020. 12. 12. 20:49

 

간화선 수행에 대해서

 

"초기 불교의 정신을 되살린 것이 선이라면, 선 수행을 하는

현대의 수행자들도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들이 그랬듯이

대부분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럴까?

우리가 불교 수행을 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한 마디로 말해 '부처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이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로 네가 될 수 없고,    이 나무가 그대로 저 나무가

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단지 부처님과 같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부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부처님을 닮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부처님의 몸과 마음 중 그 마음을 닮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문제는 아주 단순해졌다.     우리는 부처님의 마음을 닮기

위해 수행을 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마음을 닮는다고 할 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부처님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던 '감성'이고 다른 하나는 출가 후 성도하여

체득한 '깨달음'이다.      그리고 문제는 대부분의 선 수행자가

이 가운데 '깨달음'만을 체득하기 위해 수행한다는 데 있다.

보리수 아래 앉아 체득한 부처님의 깨달음은 지적(知的)인 

깨달음이다.       무명이 타파되면서 연기의 이치를 자각하신

깨달음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출가하기 전부터 우리와 다른

위대한 '감성'을 갖추고 계셨다.      하나는 모든 생명체를 

자신의 몸과 같이 대하는 '자비심'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인

쾌락을 싫어하는 '염리심(厭離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우는 이런 감성이 완성된 상태로 태어났기에

보리수 아래 앉아 지적인 수행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남에게 화내고, 시기하고, 남을 미워한

적도 있으며, 재물이나 명예나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을

모두 버리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탐.진.치의 삼독심을 모두

갖고 태어나 그것을 모두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란 말이다.      삼독심 가운데 탐심은 부정관 수행을 통해

정화할 수 있고, 진심은 자비관 수행을 통해 정화할 수 있으며,

치심은 연기관 수행을 통해 정화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 전체를 닮기 위해서는 

선 수행을 통해 지적인 깨달음을 추구하기 전에, 

탐심과 진심을 가라앉히는 부정관과 자비관을 닦음으로써

우리의 감성을 정화해야 한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 앉아 체득하신 지적인 깨달음을 체득하기 이전에,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 앉기 전부터 갖고 있던 두 가지 마음,

즉 염리심과 자비심을 먼저 체득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를 향해 끄는 마음인 탐욕은 나로부터 미는 수행인 부정관을

통해 제거되고,    나로부터 미는 마음인 분노심은 나를 향해

끄는 수행인 자비관을 통해 제거되며,     나를 높이는 마음인

교만심은 나를 낮추는 마음인 하심에 의해 제거된다.  

그리고 율(律)의 준수와 자자, 포살 의식은 이런 감성의

조련(調練)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다.  

이런 감성 수행들이 선 수행을 뒷바침할 때 선 수행은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간화선 수행의 바람직한 방향(글, 지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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