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크랩] <돈점(頓漸)의 문제>-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

혜월(慧月) 2017. 5. 19. 20:38

 

                                               <돈점(頓漸)의 문제>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

                                         

                                                     성철 스님

               

1. 돈교(頓敎)

 

   얕고 깊은 일정한 수행단계를 거치지 않고, 즉 도를 닦아가는 차례와 단계를 밟지 않고, 모든 지위를 초월해 단박 깨달음에 이르게 함을 가르친 법문을 일컫는 말이다. 돈오(頓悟)와 같은 맥락이고, 점교(漸敎)에 대비된다.

   돈교(頓敎)는 특별히 상근기의 지혜로운 수행자를 위해 문자 언어와 사량(思量)을 여의고 수행 차제를 뛰어넘어 불성의 진여 자리를 성취케 하는 교법으로 돈교의 대표적인 경전으로는 <유마경(維摩經)> ․ <원각경(圓覺經)> 등이 있다.

   대체로 <화엄경>도 돈교(頓敎)의 가르침이다. 화엄은 처음부터 완전한 세계로부터 시작된다. 당나라시대의 화엄종 제4조 징관(淸凉 澄觀 : 738~839)도 화엄은 돈교임을 주장했다. <화엄경>은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라고 했으며, 역대 조사 스님들 역시 한결같이 ‘중생의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는 의미의 본래성불(本來成佛)을 강조했는데, 본래성불이 돈오견성(頓悟見性)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궁극의 불교 가르침, 직관의 가르침을 돈교라고 봤다.

   부분적으로 세상을 보던 소승의 사상이 대승으로 오면서 전체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됐다. 소승적 눈으로 보면 세상은 분명 점교이고, 차제법문(次第法門)이란 말이다. 그러나 대승적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 그냥 그대로 돈교이다. 본래성불(本來成佛)이 돈교를 뜻한다.

   특히 돈오(頓悟) 성불론은 선종에서의 주장이다. 즉, 미망과 깨달음은 한 생각 차이이니 본성이 단지 일념에 상응해 중생의 자아가 바로 본성을 보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 돈오설불론(頓悟成佛論)이다.

   그리하여 육조 혜능(慧能, 638~713) 대사는 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지식들이여, 근기가 낮은 사람이 돈교를 듣는 것은 마치 약한 나무나 작은 풀이 큰 비를 만난 것과 같다. 뿌리가 약한 나무나 작은 풀이 큰비를 맞으면 모두 거꾸러져 더 자랄 수 없듯이 근기가 낮은 사람들도 이와 같다. 원래 반야의 지혜를 갖추고 있어 큰 지혜가 있는 사람과 차별이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고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가? 이는 삿된 견해가 무거운 걸림돌이 되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렸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 구름이 흩어지지 않으면 햇살이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다.”

   “반야의 지혜는 본디 크고 작은 것이 없다. 하지만 모든 중생이 어리석은 이들과 슬기로운 이들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그 지혜가 같지 않다. 밖에서 찾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찾아 수행하면 자신의 성품을 깨달을 수 없으니 이는 근기가 낮은 사람이다.

   만약 돈교를 듣고 알았다면 바깥 경계에서 공부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마음에서 늘 바른 견해를 일으킬 뿐 번뇌와 망상에 언제나 물들지 않으니 이것이 곧 참 품을 본 것이다.…”

   그리고 “자성(自性)은 둘이 없는 불이법(不二法)이고, 불이법인 자성을 깨닫는 것이 돈교(頓敎)이다. 세계의 모든 법의 자성은 둘이 없는 불이법이고, 세계의 온갖 법을 볼 때 불이법으로 보는 것이 견성(見性)이다. 다만 언제나 어디서나 불이법을 보는 견성이 바로 돈교인 것이다. 불이이므로 당연히 선정을 닦아 해탈을 이룬다고 하지 않으며, 유루니 무루니 하고 나누지도 않고, 유위니 무위니 하고 나누지도 않으며, 중생이니 부처니 하고 나누지도 않고, 수행이니 깨달음이니 하고 나누지도 않는다.”

   돈교에는 문득 깨달음만 있을 뿐, 점진적인 수행은 없다. 문득 깨달아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면 만법을 대함에 언제나 불이법문 속에 있으니 늘 한결같고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혜능 대사는 이렇게 읊었다.

     “바른 견해를 일러 출세간이라 하고, 삿된 견해를 일러 세간이라 한다.

     삿됨과 바름을 모두 물리쳐버리면 깨달음의 본성은 완전히 흠이 없다.

     이 게송은 돈교이며, 또 진리의 배라 부른다.

     어리석게 들으면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깨달으면 찰나 사이일 뿐이다.”

   육조 혜능 이전의 불교는 저쪽 언덕에 거룩한 부처님이 계시고, 이편 언덕에서는 한심한 내가 있어,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닮기 위해 길고 고된 수행을 해나가는 것으로 설정돼 있었다. 그러나 육조의 선(禪)은 이러한 점교(漸敎)의 발상을 일거에 쓸어버렸다. “다시 기억해라. 네가 곧 부처다. 너를 하찮게 보는 사람들의 혀에 속지 마라!” 이것이 돈교이다.

 

2. 돈오돈수(頓悟頓修)

 

  (1) 보조 국사(普照國師)와 성철(性澈) 스님

   불교는 수행을 강조한다. 때문에 돈오돈수(頓悟頓修:깨치면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와 돈오점수(頓悟漸修:깨친 후에도 계속 닦아야 한다)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다.  

   돈오돈수는 깨달은 이후(돈오)에 더 이상 궁극적으로 닦아야 할 것이 없이 단박에 모든 것이 전부 닦아졌으므로(돈수) 더 이상 닦아야 할 것이 없는 절대 경지의 깨달음을 일컫는 것이고, 돈오점수는 깨달은 이후(돈오)일지라도 오랫동안 살아온 습기(習氣, 과거의 잘못된 습관)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려면 점차로 습기 제거를 위한 닦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돈오점수는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처음 말하고 난 이후, 우리나라 불교에서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진심(眞心)의 이치를 먼저 깨친 뒤에 오랜 습기(習氣)를 제거해가는 수행방법이다.

   그러다가 근래에 들어 성철(性澈, 1912년~1993) 스님이 그의 저서 <선문정로(禪門正路)>를 통해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설을 비판하고 돈오돈수를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육조 혜능(慧能, 638~713) 계통에서 돈오돈수를 주장했고,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 이후 돈오돈수설을 고수하고 있다.

   성철(性澈) 스님이 돈오돈수설을 주장한 후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 하는 것을 놓고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는 중국 그리고 티베트에서도 깨달음이란 돈오냐, 점오냐 하는 논쟁이 있었음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철 스님은 <선문정로>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선(禪)의 올바른 수증(修證)이고 돈오점수(頓悟漸修)설은 선의 이단 수증론이라고 역설했다. 적어도 선수증(禪修證)에 관한 한 돈오점수는 애초에 틀린 것이고, 오직 돈오돈수여야 옳다고 말했다. 돈오돈수는 닦아서 깨친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라서 범부중생으로서는 함부로 토를 달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수증론에서 대표적인 논란의 대상이 됐던 것이 돈오와 점오, 돈수와 점수, 증오와 해오의 문제였다. 여기서 해오(解悟)는 문자와 이론으로 깨달음을 아는 것으로, 언어로만 아는 것이기에 궁극적인 깨달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증오(證悟, 자신이 깨달음을 체득함)라야 진정한 깨달음이요 대각의 성취라고 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 하는 것이 오랫동안 수증론에 논란의 대상이 돼왔다. 대체로 육조 혜능(慧能) 대사 계통의 맥을 이은 성철(性徹) 스님이 돈오돈수를 주장했고, 고려시대 보조 지눌(普照知訥) 국사가 돈오점수론을 주장했으르로 성철 스님이 보조 국사를 비판함으로써 상당한 물의가 일어난 것이다.

   

  (2) 가려진 마음

   중생에겐 불성(佛性)이 있다. 하지만 가려져 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바로 불성이 가려져 있느냐, 완전히 드러나 있느냐의 차이다. 뭐가 가리냐 하면 바로 내 마음이 가리고 있다. 그러니 이런 마음으로 죽어라고 찾아봐야 더더욱 가려질 뿐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이 마음이 그 부처의 성품을 가린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라,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금강경>에 마음을 항복 받아라 하는 내용이 나온다. 수행을 방해하는 게 바로 내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가만있지 않고 천방지축이다. 그래서 가부좌 틀고 앉아 있어도 온갖 망상이 떠오른다. ‘나’란 놈은 즉 마음인데, 고요하게 있지 않으려고 한다. 고요하게 있으면 불성이 드러난다. 그러면 이 ‘나’라는 놈은 사라지게 된다. 박살이 난다.

   진리와 나(마음)는 상극이다. 진리가 드러나면, ‘나(我相)’는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나’라는 놈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해를 한다. 그게 망상이다. 저 성품(불성)을 깨닫지 못하면, 이 마음을 ‘나’로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아(無我)의 뜻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부처님 법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가 없다. 겨우 이론 밖에는…, 그러니 해탈의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마음을 ‘나’로 알고 도를 닦고 있으니까 윤회의 주체를 갈고 닦고 앉아 있는 꼴이다. 움직이는 이 마음, 이걸 ‘나’로 알고 도를 닦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불교 이외에 도 닦는 곳들이 모두 다 이 마음을 ‘나’로 알고 도를 닦고 있다. 그래서 해탈이 그런 곳엔 아예 없다.

   일상적으로 쓰는 이 마음, 움직이는 이 마음은 허상이고, 진짜 ‘나’는 아니다. 그냥 생겼다가 사라지는 생각의 파편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 파편들이 계속 이어지니까, ‘나’가 항상 있는 줄 안다.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인다. 마치 하늘의 구름과 같다. 항상 구름이 끼여 있어서 하늘의 태양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태양은 언제나 거기에서 빛나고 있다. 헌데 그 구름을 단 한방에 모조리 치워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하루하루 수행을 하면서 조금씩 치워버리는 것이 돈오점수(頓悟漸修)이고, 한방에 확 치워버리는 게 돈오돈수(頓悟頓修)이다.

   

  (3) 돈오돈수(頓悟頓修)

   이에 대해서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는, “성문(聲聞)은, 성인(聖人)의 마음에는 본래 지위ㆍ인과ㆍ계급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마음으로 헤아려 허망한 생각을 해 원인을 닦아 결과를 얻으려 한다.”고 하면서, “만약 상근기 중생이라면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서 말을 듣고 바로 알아차려서,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즉시 본성을 깨닫는다.” 고 했다.

   그런가 하면, 황벽 희운(黃蘗希運, ?~850) 선사는, “도(道)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잃고 자기의 본래 마음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에서 찾고 구하며 애써 노력해 순차적으로 깨달으려 한다면, 무한한 세월을 애써 구하더라도 영원히 깨달음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당장 마음이 없음만 못하다.”고 했다. 불성론(佛性論)이 돈오를 뒷받침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는, “한 번 마침에 모두를 마치는 것이며, 한 번 깨달음에 모두를 깨닫는 것이며, 한 번 증득(證得)함에 모두를 증득하는 것이다. 마치 한 타래의 실을 끊음에 한 번 끊으면 한꺼번에 끊어지는 것처럼, 가없는 법문을 증득함에도 단계란 없다.”고 했다.

    

3. 점교(漸敎)

   

  (1) 점교(漸敎)

   점교(漸敎)란 중생의 근기에 따라 단계적으로 설법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교리를 점(漸)ㆍ돈(頓)으로 나누어 설명할 때, 간단하고 쉬운 교리로부터 점차 심오한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점교이다. 즉, 점차 단계적으로 수행해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가는 법문을 말한다.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얕은 가르침으로부터 깊은 가르침으로, 또는 작은 것에서 점차 큰 것으로 순서를 밟아가며 중생을 교화시키는 방법이다. 즉, 순서에 따라 점진적으로 수행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으로 점수(漸修)와 같은 맥락이다.

   돈(頓)은 즉각적인 깨침을 강조하는 선의 전통인 반면 점(漸)은 점차적인 수행을 강조하는 교학의 전통이다. 물론 돈교와 점교를 선불교에 한정해서 사용할 때는 혜능(慧能)의 남종선이 돈교가 되고, 신수(神秀, 606?~706)의 북종선이 점교가 된다. 또한 각 종파에서 경전을 가치판단에 따라 정리한 교판에 따르면 돈교와 점교의 대상이 달라진다. 예컨대 천태교판에서는 <화엄경>이 돈교에 속하고, 부처님의 초기 교설인 <아함경>이 점교에 속하지만, 화엄교판에서는 <유마경>이나 <원각경>을 돈교로 구분하고 있다.

   

  (2) 점수(漸修)

   수행에 있어서 차차 점진하며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 ― 점진적으로 닦아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이 벼락 치듯 갑자기 올 수도 있고, 점진적인 수양을 통해서 천천히 올 수도 있다. 돈오(頓悟)란 진리를 한꺼번에 깨친다는 말이다. 그리고 점수란 점진적으로 수행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도 돈오 이전에 점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돈오 후에 점수한다는 주장이 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의하면, 신수(神秀)의 점수와 혜능(慧能)의 돈오는 서로 대립된,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다. 번뇌의 존재를 인정하는 신수의 북종은 점진적인 방식으로 계(戒)ㆍ정(定)ㆍ혜(慧)를 통해서 닦아야 한다. 그러나 혜능의 남종은 자성(自性), 본성(本性)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보면 계ㆍ정ㆍ혜가 자성에 그 자체로 갖춰진 까닭에 별도의 닦음을 가차하지 않는다. 이런 깨달음의 강조는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이라 양진영에 긴장감과 함께 우열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들 사이는 기존의 패러다임과 혁신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면서 생겨난 ‘본질적 긴장’과 같은 종류 같은 팽팽한 갈등이 있다.…

   <육조단경>의 혜능은, 앞에서 보듯이 신수의 계ㆍ정ㆍ혜 삼학에 대한 가르침과는 다르게, 계ㆍ정ㆍ혜 삼학을 아예 세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기 성품을 보는 ‘견성(見性)’을 강조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정ㆍ혜에 기반 한 수행전통에서 보면, 혁신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사실 자성(自性), 영성(靈性), 불성(佛性)에 수행의 기준점을 둔다면, 사실상 ‘닦음’이 필요가 없다. 왜냐면 자성은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는 모든 공덕과 지혜와 선정을 스스로 이미 갖춘 까닭이다. 이것들을 구하기 위해서 다시 ‘닦음’이란 인위적인 노력을 두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이런 입장에 서면 자성에 대해서 단지 돈오일 뿐이고, 번뇌에 대해서 돈수(頓修)만 인정된다.

   그렇긴 하지만, 혜능은 전통적인 정ㆍ혜의 수행에 대해서 부정만은 하지 않았다. 왜 그런가? 이점에 대해서 <육조단경>에는 직접적인 설명이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기존의 뉴튼의 절대적 공간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공간에 의해서 흡수돼 포섭된 것과 유사하게, 기존의 계ㆍ정ㆍ혜란 개념을 자성, 심지, 본성, 영성, 불성에로 통합해버린 것이다.…

   전통적인 수행체계인 계ㆍ정ㆍ혜 삼학에 대해서 <육조단경>의 혜능은 점차적인 점수(漸修)의 입장을 세우지 않고, 급진적인 돈수(頓修)의 입장을 견지했다. 왜냐면 계ㆍ정ㆍ혜 삼학은 이미 자성, 본성에 갖춰진 공덕이고 자질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질서와 평화와 지혜는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본성에 온전하게 갖춰진 까닭에 ‘발견’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원래 번뇌는 존재하지 않고, 인연의 결과로서 그대로 곧 깨달음인 것이다.

   인도불교의 입장이 점수적인 관점을 대변한다면, 중국의 혜능은 돈오를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육조단경>의 혜능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불교의 탄생을 주도했다고 평가할 수가 있다. 불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시대가 바뀌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갱신돼온 역사가 아닌가 한다. 지속과 혁신, 보수와 진보, 양자 간의 ‘팽팽한 긴장’이 우리 시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가는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인경 스님

 

  (3) 돈오점수(頓悟漸修)

   줄여서 돈점(頓漸)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선(禪) 수행을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진심(眞心)의 이치를 먼저 깨친 뒤에 오랜 습기(習氣)를 제거해가는 수행방법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주장이다.

   지눌(知訥) 스님은 깨침과 닦음의 이론으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인 돈오점수를 주장했거니와 돈오점수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 먼저 돈점(頓漸)이란 말이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깨침과 닦음의 종교인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깨침과 닦음이 시간과 단계를 거치는 점차적인 것인가[漸], 아니면 시간과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頓] 가능한 것인가 하는 논의가 있어왔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그러한 논의가 활발해 점차적이라고 보는 입장을 점문(漸門) 혹은 점교(漸敎), 바로 가능하다는 입장을 돈문(頓門) 혹은 돈교(頓敎)라고 했다. 그러나 돈점에 관한 논의는 쓰임에 따라 각기 다르니 그를 대략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부처님 설법형식에 의한 구별 - 예를 들면 근기를 초월해 바로 설했다는 <화엄경>은 돈교, 근기에 맞추어 점차로 설한 <아함경>, <방등경>, <반야경> 등의 여러 경은 점교.

    ② 수행의 차례에 관한 분류 - 일정한 차례에 따르지 않고 단번에 해탈을 얻는 방법을 말한 것을 돈교, 원칙적으로 차례를 밟아서 해탈케 하는 가르침을 점교.

    ③ 수행의 과정에 따른 구별 - 돈교에 의해 일시에 깨침을 얻는 것을 돈오(頓悟), 점교에 의해 수행해 첨차로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나아가는 것을 점오(漸悟). 이 경우 전자는 수행하는 절차와 경과하는 시간을 말하지 않으나 후자는 그 과정으로 칠현(七賢), 칠성(七聖), 52위(位),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 등을 말한다.

    ④ 선종에서 깨침을 기준으로 한 분류 - 시간과 차제를 거치지 않고 일시에 바로 깨칠 것을 주장하는 것이 돈, 점차로 차제를 밟아 깨친다고 하는 것이 점. 물론 지눌이 말한 돈점은 선(禪)에서 깨침을 중심으로 논하는 입장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면 선에서 돈점설의 배경은 어떠한 것인가?

   선에서 돈점설의 원형은 초조 달마(達磨, ?~528)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이입(二入)은 돈오로 사행(四行)은 점수로 각기 대비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돈점의 논의를 위해 <육조단경>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단경>에서의 이른바 “남돈북점(南頓北漸)”이 혜능(慧能)의 친설인가 하는 의문은 접어두고라도 적어도 거기서 선에서의 돈점 논의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남 ‧ 북종이란 말은 육조 혜능과 그 문인들을 남종, 신수(神秀)를 북종이라 했음은 주지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 간에는 지역적 차이 이전에 선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현저했으니, 근본적으로 남의 혜능이 돈오를 강조했다면 북의 신수는 점수를 강조했다. 혜능의 가풍을 남돈선(南頓禪) 혹은 남돈종(南頓宗), 신수의 가풍을 북점선(北漸禪) 혹은 북점종(北漸宗)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 신수와 혜능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바로 점문과 돈문, 점종과 돈종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신수(神秀)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본래청정하다. 이것을 지키고 잃지 않겠다는 노력이 종교적 실천이며 닦음이다. 몸은 보리수며 마음은 명경대다. 티끌에 더럽히지 않도록 신ㆍ구ㆍ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지키고 닦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학(三學)이란 악을 짓지 않는 것이요[戒], 뜻을 맑히는 것[定]이며,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慧]이다. 신수에 있어서 마음은 거울과 같다. 따라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 마음의 거울에 티끌이 묻지 않도록 열심히 털고 닦는 일이다. 즉, 그의 선은 ‘거울 닦는’ 작업이며, 그것은 ‘닦음’에 중점이 있다.

   이러한 신수 선의 입장을 잘 나타내는 것이 돈황 문서 중의 하나인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磨南宗定是非論)>이라는 혜능의 제자 신회(神會, 670~762)의 저술이다. 이 책은 8세기경 신회가 북종을 이단으로 몰아치며, 남종을 선양한 기록으로 북종 신수의 가르침을 가리켜 “마음을 응집해서 명상하고, 마음을 가라 앉혀서 고요함을 유지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밖을 제어하고, 마음을 닦아 안으로 깨달음을 구하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단경> ‘남돈북점품’에서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관(住心觀靜)하는 것”이라는 북종에 대한 <단경>의 평과 일치한다.

   여기에 비해 혜능의 남종선은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는 사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요, 깨침을 강조할 뿐인 것이다. 그야말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소식이다. 그에 있어서 선(禪)은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거울 닦는’ 일은 아니다.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관하는 것’은 선(禪)이 아니라 ‘병(病)’이다. 선(禪)은 혜능에 의하면 본래 산란하지 않은 자성(自性)에 눈뜨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성자오(自性自悟)요, 돈오돈수(頓悟頓修)이며, 역무점차(亦無漸次)인 것이다.

   여기서 ‘돈오돈수 역무점차’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깨침이란 점차적인 것이 아니라 돈오며 돈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혜능의 삼학은 밖으로 무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자기성품으로부터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자기성품으로부터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계(戒)요, 정(定)이며, 혜(慧)인 것이다. 이는 바로 자성이 일상생활에 밝게 드러나는 일행삼매(一行三昧)요, 그러므로 돈수인 것이다. <단경>은 남돈가풍은 대근지인(大根之人)을 위한 수승한 가르침이요, 신수의 북점가풍은 소근지인(小根之人)을 위한 열등한 가르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선의 돈점(頓漸) 논의는 남북종 간의 많은 논란이 돼오다가 징관(澄觀, 738-839)과 종밀(宗密, 780-841)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체계를 지어 구분했다.

   지눌에 의하면, 징관은 깨침[悟]을 닦음[修]에 종속시켜 점의 문을 세웠고, 종밀은 닦음을 깨침에 종속시켜 돈의 문을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두 사람이 같은 돈오점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돈 ‧ 점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즉, 징관은 점문(漸門)의 입장에서 수(修)를 강조하는가 하면, 종밀은 돈문(頓門)의 입장에서 오(悟)를 강조하는 돈오점수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징관과 종밀의 입장을 섭렵한 다음에 지눌은 그들의 돈과 점을 아울러 그 자신의 돈오점수설을 확립했다.

   지눌은 “돈오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해, 제 성품이 참 법신임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허덕이며 헤매다가 갑자기 선지식의 지시를 받고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제 본성을 보면 번뇌 없는 지혜의 본성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니 그 때문에 돈오라고 한다.”라고 했다.

   돈오란 ‘심즉불(心卽佛)’이라는 사실에의 눈뜸이며, 자기존재의 실상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다. 돈오가 있기 전에 ‘나’에 대한 인식은 ‘사대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미혹이었다. 그 존재에 대한 미혹의 결과가 부처를 찾으면서 마음 밖으로 추구하는 이른바 ‘외구(外求)’이다. 그러던 것이 선지식의 가르침으로 일념회광(一念廻光)해서 마음을 반조(返照)했을 때 존재의 실상이 밝게 드러난다. 그 드러난 모습은,

    ① 본래 번뇌가 없으며[本無煩惱]

    ② 무한한 지혜가 본래부터 갖추어져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자리라는 것이다.

   본래 번뇌가 없다는 사실의 발견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투철한 앎이 없을 때 번뇌는 끊어야 할 대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오는 본래 번뇌란 실체가 없고 따라서 끊어야 할 대상도 아니라는 사실에의 눈뜸이다. 이 눈뜸은 일념회광으로 비로소 가능하다. 한 생각의 돌이킴으로 해서 견자본성(見自本性)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념회광과 견자본성은 하나이며 동시이다. 그러므로 ‘돈(頓)’인 것이다. 지눌은 반조자심(返照自心), 회광반조(廻光返照) 등의 표현을 함께 쓰기도 한다. 일념회광은 단순한 지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실상을 확실히 아는 생생한 체험이며, 그것은 미(迷)에서 오(悟)로의 질적인 전환을 말한다. ‘내가 부처’라는 말은 바로 이때에 터지는 탄성이다.

   헌데 이렇게 자성의 참모습을 분명히 깨쳐 아는 돈오는 수행의 구극이며 완성인가?

   지눌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지눌에 의하면, 돈오란 불과(佛果)를 증득한 최후의 완성이 아니라 처음으로 마음의 실상에 눈뜨는 체험이며, 따라서 완성을 위해서는 점수가 필요하다고 했다. 마음의 성상(性相)을 확실히 아는 것이 구태여 완전한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오는 수행의 완성이 아니라 참다운 닦음의 출발이며 진정한 의미의 신(信)의 확립인 것이다. - 강건기

 

   돈오점수론은 깨쳤더라도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이다. 훈습론(熏習論)인데, 훈습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과거부터 익힌 어떤 습관을 말한다. 정확히 말해서 훈습이란 어떤 향기가 옷에 밴 거나 내 몸에 밴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습기(習氣)라고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생각의 전환이 왔다고 해서 모든 생활이 단번에 180도로 전환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게 돈오점수설의 기초이다. 깨쳤다 해도 습기는 남아 있으니 점차 닦아 나가야 한다는 돈오점수설에 비해 돈오돈수설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오점수설, 돈오돈수설 모두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수타니파타(Suttanipata-경집/經集)>에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에 오는 것도 아니고, 점차적으로 오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이게 부처님의 근본입장이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돈오도 아니고 점오도 아니라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돈점 논쟁은 비불교적인 논쟁이라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번잡해지고 쓸데없는 걸 가지고 논쟁을 하는 그런 형태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돈점논쟁은 분명이 있다.

  

4. 돈점논쟁(頓漸論爭)

  

  (1) 중국에서 돈점논쟁(頓漸論爭)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불교의 깨달음에 대해 돈오를 주장하고, 그에 따라 돈(頓)ㆍ점(漸)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바로 동진(東晉)때의 도생(竺道生, ? ~434)이었다.

   도생에 의해 깨달음의 방법론에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이 제시되고, 그에 따라 ‘돈점(頓漸)’ 논쟁이 일어나게 되자, 중국불교의 모든 종파와 불교인들은 돈오 혹은 점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바로 ‘깨달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오의 이론은 불성론(佛性論)의 발전과 동일한 행보를 갖고 있었다.

   돈오가 중국불교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나라시대에 선종에서 다시 돈점논쟁이 나타났다. 이른바 ‘남돈북점(南頓北漸)’의 논쟁인데, 혜능(慧能) 계통의 남종은 ‘돈오’이고, 신수(神秀) 계통의 북종은 ‘점오’에 머물러 있다는 논쟁이다. 이는 사실상 북종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혜능(慧能) 계통의 남종이 중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면서 ‘돈오’의 이론과 방법은 명실상부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선종의 ‘돈오론(頓悟論)’은 중국의 전통사상과 정서가 혼합돼 본래 인도불교의 교의와는 형식과 내용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색채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형성된 ‘돈오’와 인도의 전통적인 불교가 중국과 인도가 아닌 다른 장소인 티베트에서 만나 정면으로 부딪히는 상황이 나타나게 됐다.

   티베트 티송 데첸(TriSongDeChen, 742~797, 赤松德贊)왕의 주제로 인도 승 적호(寂護)의 제자 까말라실라(Kamalasila-파드삼바바)와 중국 하택 신회(荷澤神會, 670-762)의 제자 대승화상(大勝和尙, 마하연) 사이에 돈점논쟁이 전개된 것이다. 논쟁의 결과에 따라서 패한 측은 승리한 측에 화환을 헌상하고 티베트를 떠난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됐다. 티베트의 자료에 의하면 이 논쟁은 서로 간에 아주 격렬하게 진행됐고, 그 결과는 초반에는 대승화상이 우세했으나 결국 패배해 사주(沙州; 지금의 돈황)로 쫓겨나고, 그에 따라 인도불교가 티베트 사회에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고 한다.

   

  (2) 우리나라에서 돈점논쟁

   최근 우리나라에서의 돈점논쟁은 1981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성철(性徹) 스님이 그의 저서 <선문정로(禪門正路)>를 세상에 냄으로써 시작됐다. 논쟁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 보조사상연구원이 송광사에서 개최한 “불교사상에서의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였다. 이 대회에 참석한 돈오점수론자들이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다시 3년 뒤인 1993년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백련불교문화재단에서 학술회의를 열었다. 이 학술대회에선 돈오돈수에 의한 반론이 적지 않았다.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를 두고 성철 스님은 이미 1967년 해인사 방장으로 취임하던 해 <백일법문>에서부터 돈오돈수를 주장하며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해왔다.

   성철 스님은 <선문정로>에서 선종의 돈점론을 가장 체계적이고도 성공적으로 종합해 깨달음과 닦음의 선불교적 모범 답안을 마련한 분으로 평가받던 지눌 선사를 정면적인 비판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 또한 오랫동안 한국 선불교의 표준수행준칙으로 간주돼온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선문 정통의 배반이며 정법(正法)의 최대 장애물이라고 맹공하고 있다. 초인적 수행을 통해 탁월한 깨달음을 성취한 분으로 존중 받던 성철 스님이 돈오점수를 비판한 것이었기에 한국 선불교의 관행과 토대 자체를 흔들어버리는 엄청난 충격이었다.큰스님(성철)은 보조 지눌(普照知訥) 국사를 엄청 비판했지요. 그걸 ‘돈점논쟁’이라 부르는데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수증론(修證論, 닦음과 깨침의 논리)을 말하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문자와 이론으로 깨달음을 아는 것은 해오(解悟)이지 증오(證悟, 자신이 깨달음을 체득함)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증오라야 진정한 깨달음이요, 대각의 성취이지 해오의 단계는 문자와 언어로서만 아는 것이기에 궁극적인 깨달음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큰스님이 보조 스님을 비판하는 대목은 초기 보조사상은 ‘해오’에 머물렀으나 보조 스님 말기에는 ‘증오’라야 한다고 보조 스님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는데, 후학들은 초기의 보조사상에만 머물러 있다는 질타(叱咤)이지요. 보조 스님을 바로 알고 참선수행자는 돈오돈수를 근본목표로 해야 한다는 큰 가르침이지요. 큰스님은 자신의 이 말씀을 <선문정로(禪門正路)>라는 책에 자세히 해 놓으셨지요.”』- 무비 스님

 

   그런가 하면 돈오점수를 편드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돈오수동불(頓悟雖同佛) - 곧장 깨달으면 부처님과 같지만

     다생습기심(多生習氣深) - 다생에 찌든 버릇은 그대로이네.

     풍정파상용(風定波尙湧) - 바람은 잠잠해져도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현염유침(理現念猶侵) - 이치는 드러나도 망상은 쉽게 없어지지 않네.

   이는 돈점에 과한 보조 국사(普照國師)의 게송이다.

   한국 불교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가 돈점논쟁이 아닌가 한다. 마음공부의 모든 이치는 부처님의 경전이나 많은 선사들의 어록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으며, 또한 굳이 마음 밖에서 확인을 않더라도 공부인은 공부과정에서 스스로 확인을 할 수가 있다. 체험 후에 공부가 익어감에 따라서 점차 경계에 꺼들리는 마음이 조복되고 차차 안정돼 감을 스스로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스스로 확인이 되고 경(經)과 전(傳)에서 확인이 가능한 것을, 백해무익한 돈점논쟁을 일으킴으로써 많은 수행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깨달음의 해가 뜨더라도 무량겁에 얼어붙은 중생심의 얼음은 곧장 녹지 않는다. 또한 어떤 체험이 있다 한들, 이치가 밝지 않다면 그 체험은 아직 온전한 체험이 아니다. 비록 번뇌장(煩惱障)을 넘어섬으로써 일상적인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경전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미세한 생각마저 벗어나기는 대단히 어렵다. 때문에 체험 후의 공부의 과정에서는 진실로 선지식의 냉철한 지도가 반드시 그리고 끊임없이 필요한 것이다.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지만 <능엄경>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치는 곧 깨달을 수 있는지라 깨달음과 함께 의문은 소멸되나 습기(習氣)는 곧 바로 제거할 수 없기에 차례를 인해 점차 소멸이 돼간다 - 이즉돈오(理則頓悟) 승오병소(乘悟竝消) 사비돈제(事非頓除) 인차제진(因次第盡).」

 

5. 종합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닦음을 중요시했고, 대승불교는 깨달음을 중요시했다. 점수(漸修)는 ‘점진적 수행(gradual progress)’이라는 의미이고, 돈수(頓修)는 ‘급진적 수행(rapid progress)’이라는 의미로서, 천태교판(天台敎判)에서는 점교(漸敎)와 돈교(頓敎)로 나누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돈점(頓漸) 논쟁은 인도가 아닌 중국에서 중요하게 대두됐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깨달음’에 대한 방법과 내용에 깊이 천착한 나머지 돈오(頓悟)를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점수와 돈수는 분석과 직관(분별과 무분별)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근본불교는 ‘지혜의 도’를 추구함에 있어서 분석적 방법을 채택했고, 대승불교는 ‘신앙의 도’를 추구함에 있어서 직관적 방법을 채택했다. 따라서 분석적인 방법은 점수로, 직관적 방법은 돈수로 귀결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분별지(分別智)를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남방 상좌부는 불교를 ‘분별설(分別說, Vibhajjavāda)’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남방 상좌부를 ‘분별설부(Vibhajjavādin)’라고도 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분별지를 낮추어보는 측면이 강하다. 대승불교 중에서도 특히 중국에서 태동한 선불교에서는 분별지를 뛰어넘는 무분별지(無分別智)야말로 최고라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최초로 ‘돈오론(頓悟論)’을 제기한 사람은 동진(東晉)때의 도생(道生)이었다. 그 후 중국에서는 ‘돈오’가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했다. 그 원인은 중국인들의 사유방식과 정서에 ‘돈오’의 이론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선종의 ‘돈오론’은 중국의 전통사상과 정서가 혼합돼 본래 인도불교의 교의와는 형식과 내용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

   인도의 전통적인 불교는 ‘점차적인 수행’ 즉 차제론(次第論)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불교는 ‘단박 깨달음’ 즉 돈오론(頓悟論)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차제론과 돈오론이 정면으로 충돌한 곳은 인도와 중국이 아닌 티베트였다.

   이른바 ‘라싸의 쟁론’으로 알려져 있는 돈점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이 논쟁의 최종적인 승리는 인도의 전통을 계승한 연화계(蓮花戒)에게로 돌아갔다. 그 승리의 원인은 문화와 정서적인 요소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라싸의 쟁론’은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티베트는 지정학적으로 인도와 중국의 중간에 놓여있지만, 문화사적으로는 인도의 사유방식과 전통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수와 돈수의 실천관은 불교의 모든 교육 프로그램에 그대로 적용됐다. 교학(敎學)은 물론 수행(修行)까지도 포함된다. 상좌불교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수함에 있어서 교학적인 측면에서는 철저하게 점진적 교육법을 고수했다. 남방의 승가교육 제도는 전통적인 교육과 현대적인 교육이 병행되고 있는데, 둘 모두 단계별 교육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현대의 교육은 거의 대부분 이 점진적 교육관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상좌불교에서는 수행에 있어서도 점진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불교의 사선관(四禪觀)을 비롯한 위빠사나(Vipassanā)도 점진적 수행법이다.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의 저서 <청정도론(淸淨道論, 비숫디막가/Visuddhimagga)>에 제시된 일곱 가지 청정[七淸淨]은 수행의 단계를 말한 것이다. 현재 태국의 경우 ‘명상(瞑想, Buddhist Meditation)’이라는 수행 과목도 제1단계에서 제7단계까지 구체적으로 세분하여 지도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의 교육관은 직관(直觀)의 원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불교적 교육의 목적은 자각(自覺)을 통한 열반ㆍ해탈에 있기 때문이다. 선가(禪家)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한 번 뛰어 곧바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간다(一超卽入如來地)’라는 말은 깨달음이 비약적인 직관임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다. 이러한 불교적 교육관에 의하면, 깨달음 그 자체는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찰나적인 비약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직관의 원리’는 삶의 현장 속에서 현장의 본질을 직감함으로써 삶의 새로운 차원을 자각케 하는 학습 원리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에서는 선교(禪敎)를 막론하고 깨달음을 중시하기 때문에 직관적 교육관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상좌불교는 점진적 수행[점수]을 선호하고, 대승불교는 급진적 수행[돈수]을 선호한다. 이러한 경향성 때문에 두 전통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는 전혀 다르게 전개됐다.“ - 마성 스님

 

   그런데 우리는 조사어록이나 선지식들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너무 경직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본다. 조사 스님들 말씀은 으레 노파심에서 중생들이 그때그때 어떤 문제에 막혀 있는가, 무슨 문제에 고민하는가에 따라 내리는 간절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점수(漸修)에 치우쳐서 자꾸만 계급을 따지고 고하, 심천을 가리는 사람들한테는 돈오돈수로써 마땅히 분별을 쳐부수어야 하겠고, ‘본래 부처인데 닦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점차로 닦아 나가는 점수를 역설해야 할 것이다. 이런 도리를 전제로 해서 법문을 이해해야 하겠다.

   따라서 돈점논쟁을 두고 어느 것이 낫다느니, 어느 것이 못하다느니 범부중생으로는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 불교 나름의 역사와 전통이 있으며, 증험(證驗)의 문제이므로 알음알이 수준으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본다. 다만 분별론은 지양돼야 할 일이다. 그리고 우리 불교의 회동정신에 입각해 결론을 도출해야 할 줄 믿는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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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misan511
글쓴이 : 아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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