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그는 안전한 사람인가?
안정되고 온전한 정신의 사람인가?
"평소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상이었을 때에도
그저 바보일 뿐이었다."
-하인리히 하이네-
우리는 상대방을 슬쩍 쳐다보거나 몇 마디 얘기만 해봐도 그 사람이
감정적으로 불안한지, 폭력성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장에서 당신은 처음 만난 데이트 상대에서부터 아기를 돌봐주는
사람이나 직장 동료에 이르기까지,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면을 주시해야 하고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터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심리적 상태를 측정하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각자 대면하는 내적인 힘과 그 힘들의 격돌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고 궁극적으로 우리 감정의 건강함 정도를 판단할 것이다.
또한 일반적인 심리적 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명백하고 구체적인 위험
신호도 추려볼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서
인간에게는 세 가지의 내적인 힘이 존재하며, 이 힘들은 종종 서로
불화를 일으킨다. 세 가지 내적인 힘은 '정신(우리의 양심)' '자아'
'육체'다. 정신은 옳은 것을 추구한다. 자아(또는 낮은 단계의 정신)는
올바르기를 바란다. 그리고 육체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기만을
바란다.
쉽고 편안 일을 추구하는 것이 육체의 추진력이다. 이러한 추진력이
지나친 방임(탐닉)을 불러오는 사례가 바로 과식이나 늦잠이다.
사실상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느냐 마느냐는
육체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달려 있다.
다음으로, 자아의 추진력은 타인을 비하하는 농담에서부터 구매
능력을 벗어나 값비싼 자동차를 사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본질적으로 자아의 추진력은 타인에 대하여 특정 방식으로
드러나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에 이끌릴 때 우리는
올바른 이미지라는 주관적 믿음으로 행동한다. 이러한 행동의 기저에는
올바름 자체가 아니라 올바르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마지막으로 정신의 활동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에 상관없이 올바른
것을 추구한다.
간단히 말해 육체는 기분 좋은 것을 원하고, 자아는 좋아 보이는 것을
원하며, 정신은 좋은 일을 행하기를 원한다.
아침에 자명종이 울리면 이 세 가지 힘은 끝까지 서로 투쟁한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알람 소리를 꺼버린다면 제1라운드 시합에서
누가 이긴 것일까?
진정한 자유란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을 하는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든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자유다.
토막 상식
당신이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초콜릿이 먹고 싶어졌다.
유혹을 이기기 위해 분투하겠지만 더 거부할 수 없다. 결국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먹는다. 당신은 초콜릿을 먹고 싶다고 느꼈고 결국
먹고 말았다. 이는 자유일까, 아니면 예속일까? 먹은 후에는 어떤
느낌이 들까? 만약 그 유혹을 이겨냈다면 자신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어떤 것을 향해 기우는 마음에 저항하고 이겨낼 때 우리는 자제심을
훈련하게 된다. 오직 책임감을 선택하고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자부심을 얻는다. 자부심과 자제심은 덩굴처럼
얽혀 있다. 만약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즉각적인 만족에 굴복하거나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면 결국
남는 것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뿐이다. 우리의 삶은 제어할 수 없는
충동과 타인에게 심어주려는 자아상에 예속된다.
늦잠을 자거나 과식을 하고 난 후 우리는 자신에게 화를 낸다.
더 나아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행동할 때에는 종종 내면에서 무의식적인
공허감을 느낀다. 행동은 자부심을 집어삼킨다. 어떤 이미지를 위해
진정으로 원했던 바로 그 행동(해야 할 올바른 행동)을 희생한 결과다.
그러한 사람은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아 늘 화를 내거나 좌절한다.
기대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의례적인 칭찬, 통제, 권력, 심지어 두려움까지 거의 모든
것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관심을 끌 기회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자신에게 없는 것, 자신이 차용한 것 그리고 무엇이든 완벽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에 집착한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결코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탐색한다. 그러고는 끊임없이 행복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밀려난다.
자신에게 매몰된 사람의 정신은 욕망, 즉 사고를 밀고 당기는 덧없는
충동에 잠식된다. 혼자 있을 때 "내 자신이 싫다" 는 무의식적
고뇌를 잠재우기 위해 무엇이든 기분을 바꿀 수 있는 일을 한다.
이런 정신의 상태는 더 깊은 악순환의 고리 속으로 빠져드는데,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느낌을 갖지 못하면 임시방편을 추구하며
현재의 만족이라는 피난처를 만들고는 그 충동에 굴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기모멸감을 감추는 쾌락은 수증기와 같아서 금세
사라지고 만다. 순간적인 위안은 곧 더 커다란 고통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때문이다. 그는 더욱 낮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만다.
우리는 자신을 싫어할 때 자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즐거움으로
위장된 방식으로 자신을 혹사한다. 지나친 식탐이나 술과 약물 남용
그리고 끊임없는 기분 전환에 빠져 들어 삶을 고찰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자멸의 길로 들어선다.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환영(幻影)으로
사랑을 대체하는 것이다.
토막 상식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유쾌하게 수다를 떨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신경을 긁는 사람에게 하루 종일 예의를 지켜 접대하고
최대한 존중심을 보여줘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마 고통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사람과 함께 살았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면? 아무리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려고
노력해도 당신은 감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렸을 것이다.
자기 생각에 골똘한 사람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것이 고역이다. 인생을 위한 노력이란
좋아하지 않는 상사를 위해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주 작은 일조차
그에게는 불만이고 고뇌다. 당신이라면 불쾌하고 절제를 모르며
거만한 사람을 위해 사랑이나 존경은 고사하고 열심히 일하거나
어떤 노력을 투자하겠는가? 아마 그저 기분을 달래거나 주의를
흩뜨리기 위해 의미없는 일을 하거나 끊임없이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심지어 취하도록 술을 먹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과 진지하게
대면하거나 엮이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말이다.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감정적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인정을 받고자 한다. 이러한
발상은 대인관계에서 충돌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모든 부정적 감정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가 갈망하는 수용과 인정은 존경에 따라
오는 것이다. 세상이 그 사람을 존경하고 그때서야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칭찬과 찬사를 자기애(이기심)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의 자기 가치(자존심)는 다른 이들의 평가에 대한 직접적인 반영이
된다. 그의 기분은 여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그대로이며 그는 일시적인
시선과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받는다.
한 사람이 자존심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타인을 통해) 필사적으로
바꾸려 하면 모든 것이 자신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가상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관심과 인정을 추구하게 된다. 무엇이든 남에게 의존하여
(관심이나 인정을 얻기 위해) 행하는 일은 우리를 감정적으로 소진시킨다.
가령 남에게 인전받기 위해 옷을 잘 차려입거나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린 경우 우리는 타인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이는 자신을 의존적 위체에 놓는 것이며 확대하면 자기중심적이고
상처받기 쉬운 위치에 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쉽게 신경이 예민해지고
불안함과 우울함까지 느낀다. 생각해보자. 우리를 만족시키는 타인의
말에 자존심을 의존할 경우(친절한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곱지 않은 시선에 기분이 나빠진다면) 세상이 부리는 변덕에 자신을
내맡기는 꼴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왜곡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극히 적은 현실만이 그 렌즈를 통과하고 그렇게 받아들인 현실조차
오래 존속되지 못한다. 그것들을 담아둘 튼튼한 그릇이 없기 때문이다.
토막 상식
컵에 물을 따르는데 컵에 바닥이 없다고 상상해보자. 물을 따르는
동안에는 컵은 가득 찬 것처럼 생각되고 또 그렇게 보인다. 물을
따르면 컵을 채우는 한 의존적인 사람은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그
행동(관심, 존경, 찬양)을 멑추는 순간 곧바로 허무함을 느끼며
이전과 같은 갈망에 빠지게 된다. 그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는 상관없다. 물을 쏟아 붓는
행위는 환영과도 같은 덧없는 만족을 주며 그 사람을 젖게 만들겠지만
그 사람을 채우지는 못한다. 그는 필사적이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타인의 사랑과 인정 그리고 존경을 추구하겠지만 자신이 받은 것을
보존할 튼튼한 그릇이 없다. 물은 따를 때와 같은 속도로 빠져 나간다.
통제 불능과 분노
낮은 자부심이란, 사람이 자신의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상태로 정의된다. 자기 존중은 자기 통제에서 비롯되므로 어떤 환경이
그 사람의 자유를 빼앗으면 그 사람의 통제력도 흔적 없이 사라진다.
사실 그런 상황은 자부심의 유일한 원천을 손상시키며 그 사람을
난폭하게 만든다. 그는 세상의 처분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기 때문에
자아에 의존하여 자신의 신념과 가치 그리고 행동뿐 아니라 타인의
의견을 청취할 권리까지 정당화하기위해 분투한다. 그 사람은 이미
통제력을 잃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건사할 수 있는 최후의
자유까지 의존하게 된다.
자신이 경멸당한다거나 통제력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사람은 모든
상황에 대해 균형 잃은 반응을 보인다. 자아를 통해 들어오는 세계만이
그의 심리 상태를 조성하는 유일한 원천이다. 존중받기를 갈망하지만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자아의 마지막 무기인 분노가 작동한다. 건강한 감정 상태에서
더 멀어지면서도 막상 화를 낼수록 통제력이 더 떨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분노를 직접 외부로 표출하며 비열해지거나 야비해지고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자신의 분노를 내면에
눌러두고 어떤 비난이나 상처도 감수하며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에 들고자 한다(다음 장에서 이 두 가지 유형에서
드러나는 암시와 신호를 살펴볼 것이다).
자부심이 낮고 감정 상태도 고르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곧 그 사람이 폭력적이라는 뜻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폭력성의 바탕은 마련된 것이며 잠재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반드시 눈여겨보아야 할 잠재된 폭력의 강력한
신호들이다. 이 신호들을 주요한 세 가지의 상황으로 구분해보자.